그동안 무작정 한국사를 공부했다. 9월 초부터, 누가 시키지도, 취업에 직접적 필요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나 지식의 갈급함으로 정말 순수하게 응시했던 시험이다. 참고로 내가 치른 시험은 67회기로 응시일은 10월 21일이었다.
한국사. 내게는 유일하게 자부심으로 기억되는 과목이다. 중고등학생시절, 다른 모든 과목들의 성적이 처참했을 때 한국사만은 유일하게 성적이 좋았다. 내가 역사를 좋아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국영수 같은 과목들이 타고난 지능의 연속선상에서의 능력을 요구했다면 역사 같은 과목은 시험 범위를 '성실히 학습'만 한다면 잘 나올 수 있는 시험이기 때문이 컸다. 즉 이해력보다는 암기와 반복 학습을 통한 '상기'가 가능한 분야라서 그랬다. 그래서 역사 과목은 고등학생 때도 다른 성적에 비해 눈에 띄게 출중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고등학생 때, 역사로 전교 1등을 한 적이 있을 정도다(기억에는 남아있지만 인증할 도리는 없어서 믿거나 말거나지만)
나는 불행히도 지능은 경계선이었지만 나름 성실한 학생이었고 반복학습과 암기식 방법이 잘 맞는 사람이었다. 역사 같은 시험뿐 아니라 제한된 범위에서 공부해서 보는 시험에 강했다. 각종 자격증의 필기시험 점수가 높았던 기억이 있다. 실기에서 다 말아먹어서 최종 불합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대학 학점도 3점대 후반으로 나쁘지 않았다. 한 학기는 4학점으로 부분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한국사 시험으로 돌아와서, 9월 초, 한국사 공부를 처음으로 다시 시작했다. 학창 시절 한국사를 제법 잘했지만 성인이 돼서는 한국사와는 전혀 인연이 없이 살아왔다. 당연히 기억은 저 망각의 강 너머 안개처럼 흐릿했고 소위 말하는 '노베이스' 상태나 다름없었다. 초심자의 마음으로 다시 시작했다.
무작정 서점으로 가서 EBS한국사능력검정 심화 문제집을 샀다. 그리고 계획 없이 책을 펴고 공부했다. 예전에 내가 공부했던 익숙한 방식인 성실하고 닥치는 대로, 많이. 한 권으로 끝내고 시험 보는 수험생들도 많았겠지만 나는 문제집도 많이 샀다. 불안도가 높은 나는 문제집 한 권으로는 성이 풀리지 않았고 EBS책이 생각보다 내 기준에서는 가독성이 떨어져 도저히 한 권으로는 끝낼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 분야 책으로 베스트셀러이자 수험생들에게 부동의 1위 책이라 할 수 있는 최태성의 유명한 책은 구입하지 않았다. 판본이 보기 불편한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최태성의 유명한 책을 사는 방법도 옳은 선택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요약정리를 하거나 오답 노트를 만드는 식은 하지 않았다. 시중에 이론 요약이 잘 된 책들도 많은데 굳이 시간을 더 들일 이유도 없었고 나는 정리하는 걸 잘 못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기출 어플의 도움을 받았다. 기출 어플에서 문제 정리가 잘 돼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기출 어플은 총 5회기 기출을 풀었고 모두 1급이었다. 다만 다소 어렵게 나온 회차는 겨우 턱걸이로 1급을 합격하는 점수라 회차별 점수차가 있었다. 만약 난도가 특별히 높게 나온다면 1급을 보장할 수 없었다. 기출을 풀 때는 손이 덜덜 떨렸고 기출 풀기를 의도적으로 기피했다.
유튜브에 무료로 풀린 동영상을 보이는 대로 섭렵하며 반나절 이상을 공부에 투자했다. 나는 어차피 무직 상태라 공부할 시간이 많았다. 불안한 만큼 공부했고 불안한 만큼 문제집을 샀다
처음부터 1급을 노렸던 건 아니다. 원래는 10월 시험이 아닌 12월 시험을 준비하려 했다. 나 자체가 단 시간에 시험을 공부해 합격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유튜브에 뜨는 2주 만에 1급, 10일 만에 1급은 내겐 먼 얘기였다. 사실은 2급부터 시작하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부를 하고 기출을 풀고 내 내부에서 울려오는 자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1급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공부를 하는 내 안의 목소리가 말했다. 나도 특출 난 스펙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특출 난 스펙 하나 없는 보잘것없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무언가 이 시험을 통해 나를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내게도 1급이라는 성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은 곧 내 자존심이 됐다. 한국사 시험은 내게 1급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졌다. 내 자존심과 사활이 걸린 시험이 됐다.
나는 꼭 1급을 받아야 했다.
시험 장소는 노원의 모 중학교였다. 나는 과거, 과거시험을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했다는 율곡 이이가 새겨진 오천 원짜리 지폐를 부적처럼 바지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그날 아침은 내 바람과 무색하게 댓바람부터 소나기가 쏟아졌다. 하늘에 세차게 내리는 빗금들이 마치 내 시험지의 빗금 같아 잔뜩 불길해졌다. 또 10시 시작인 시험에 나는 8시 30분쯤 도착했으나 네이버 지도상에서 문이 닫힌 후문으로 계속 안내가 되는 바람에 정문을 찾는데 조금 헤맸다. 안 그래도 시험 당일이라 마음이 불안한데, 그날 불길하게 내리는 빗줄기들과 그 사소한 방황이 내겐 큰 불안으로 다가왔다.
정문을 찾아 방황했지만 나는 다른 응시자들 중 제일 먼저 고사장 교실에 입성했다. 시험 보기 이틀 전부터는 거의 밤을 새운 나는 그날도 밤을 새우다시피 했지만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였다. 제일 집중이 잘 된다는 당일 시험장에서의 공부 시간은 밤을 새운 시간보다 중요했다.
OMR카드의 마킹을 몆 번씩이나 강박적으로 확인하며 시험을 본 뒤, 시험지를 가지고 나왔다. 이번 시험이 어려웠다는 말들을 흘리며성질 급하게 인터넷 검색으로 대략의 답을 맞혀봤다. 몇 문제 헷갈리는 문제가 있었고 많이 지엽적인 문제가 나온 시험이었다. 나는 빨리 답이 맞는지 알고 싶었다.
67회 가답안이 그날 당일 12시 이후부터 인터넷에 나왔다. 이미 인터넷 검색으로 내가 헷갈리거나 고친 답이 맞을 확률이 높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아예 채점을 하는 것은 달랐다.
하나하나, 온몸의 떨림을 느끼며 답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는 눈물이 나올 뻔했다. 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모든 문제가 맞았다. 한 문제만 틀리고 모든 문제를 나는 맞혔다. 나는 믿기지 않아 두세 번 다시 채점을 해봤고 모두 결과는 같았다.
나는 그곳이 지하철임을 잊고 눈물을 흘렸다. 엄마에게 바로 전화를 했고 기쁨을 나눴다. 1급만 돼도 된다고 생각했으나 뜻하지 않은 쾌거였다.
11월 3일. 최종 등급이 나올 때까지 나는 가슴을 졸였다. 수험번호 마킹을 실수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점수가 무효가 되는 건 아닐까, 다시 시험을 준비해야 하나. 오만 생각이 다 든 2주였다. 시험 결과 발표까지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리고 대망의 10시. 확인 결과 1급 97점이었다.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수와 등급은 내게 다음에 준비할 미래의 시험들과 난관에 대한 크나큰 격려로 다가온다. 역시 나는 필기에는 강하구나 하는 점을 재확인한 결과였다.
가장 어려웠던 삼국시대. 헷갈리는 붕당 정치시기, 지엽적인 근현대사.... 선사부터 현대까지 범위의 압박들 안녕.
다음에는 준학예사 시험을 준비하거나 도슨트 양성 과정에 등록해볼까 한다. 나는 역사나 문화 같은 걸 설명해 주거나 기획하는 전문가가 되고 싶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 곳에서 일하는 학예사나 해설사가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이번 시험 결과를 너무 확대해석 하며 자신감에 찬 선택이라는 걸 안다. 허나 나는 시험을 준비하고 이런 결과를 얻기까지 나를 들여다보고 내가 진정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나는 복지관에서 커피 교육을 할 때부터, 가르치는 걸 잘한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나 스스로도 가르칠 때 기쁘다는 걸 느꼈다. 잘하든 못하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외우면서 학습하는 시험 유형에 강하다. 또한 지식과 지성에 대한 욕구와 욕망도 강하다. 나는 성실하게 노력하고 우직하게 공부하는 편이다. 남들이 들었을 때 너 따위가 감히 도전도 못할 꿈이라고 무시하거나 화를 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편에서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 한 소설가의 말을 그들에게 전하고 싶다. 경계선 지능이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무시하거나 타인에게 무시당하는 당사자들 편에서 내 꿈에 도전하고 싶다. 나의 한계를 경계 짓지 않고 싶다.
나는 이번의 결과처럼, 다음 결과도 좋을 것이라 믿고 싶다. 사람들의 편견 속 전형으로 나 자신을 규정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