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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날 Apr 25. 2022

이제는 각자 집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며느리는 백년손님 PART 1] 아내는 이제 시댁에 가지 않는다

황새와 개구리

황새와 개구리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작가 미상으로 'Never ever give up'이라는 말처럼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인용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그림이 고부갈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느꼈습니다. 황새는 마치 며느리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시어머니, 개구리는 시어머니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며느리의 모습처럼 보였더랬죠.


개구리가 약자라는 건 며느리도 약자라는 의미입니다. 생각해 보니 세상은 약자가 바꾸기엔 너무 더디고 힘겹습니다.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결혼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비혼, 동거라는 새로운 가족관계를 인정해 달라는 요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형태의 가족관계를 부정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대안들의 상당수가 고부갈등이라는 문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선택이라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만약 고부갈등이 없다면 결혼은 비혼이나 동거만큼 괜찮은 선택일 수 있습니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황새는 개구리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날개도 없고 긴다리도 없고 미끌미끌한 피부에 깃털도 없습니다. 뭉텅한 몸에 날지도 못합니다. 한마디로 격이 다르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잡아먹을 듯 구박을 하니 결국 며느리도 죽지 않으려고 최후의 발악을 합니다. 결혼해서 며느리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당해야 하는 대접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죽기 살기로 반항할 수 밖에요. 이대로 가다가는 어떻게 될까요. 이 상황에서 예측할 수 있는 결과는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 한쪽이 죽는다. 황새가 숨이 막혀 죽든, 개구리가 팔에 힘이 빠져 잡아 먹혀 죽는다. 개구리와 황새는 이럴 수 있겠지만 현실에서는 분명 며느리가 남편과 시댁과의 이별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면 남남이 되고 다시 볼 일은 없게 되겠죠. 미움과 원망의 감정을 남긴 채 말이죠. 여기서 피해자는 며느리와 남편 그리고 자녀들이 됩니다. 이렇게 온전했던 한 가정이 깨지게 되는거죠.


둘째, 개구리와 황새가 서로를 놓아주고 각자의 집으로 간다. 시어머니, 며느리 모두 각자의 가정이 있습니다. 홀시어머니나 홀시아버지도 하나의 가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어머니 가정에 며느리와 아들의 가정을 포함하려는 순간 발생합니다. 자신의 품안에 품는 정도가 아니라 그림처럼 아예 통재로 뱃속에 넣으려 하니까요.


60, 70년대만 하더라도 대가족의 형태는 당연했습니다(물론, 지금도 한 건물에서 층별로 부모, 형제, 자매가 모여 사는 집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단독주택보다는 빌라, 아파트 형태의 집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핵가족이 보편화되고 고등교육을 수료한 여성이 성인이 되어서는 결혼 후 집안일이 아닌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는 경우가 더 많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직장 내 승진 차별, 임금 차별 등 불합리한 제도에 대해 남녀평등을 주장하게 되었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드러나고 있던 며느리의 대우에 대해 여성으로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히 고부갈등이라는 문제에 대해 저는 생각해 봅니다. 이제 각자 집으로 돌아갈 때가 아닌가 말이죠.


‘개구리야, 황새야, 서로 놔 주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 가족이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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