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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기념일을 잊은 남편, 이상하게 서운하지 않았다

by 언어프로듀서


출근하는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결기!”

“무슨 결기?”

“우리 12주년 결혼기념일이라고.”

“앗, 몰랐네.”

부서를 옮겨 정신없이 바쁜 요즘, 남편은 주말에도 출근한다. 그 와중에 사소한 기념일을 챙길 여유가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서운하지 않았다.

10년 넘게 산 부부가 애틋하게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것도 어딘가 더 어색하다. (내가 이상한 걸까?!)

신혼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결혼기념일을 잊은 남편에게 서운했을 거다.

아무리 바빠도 우리의 기념일은 소중하다고 말하고 싶었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앗, 몰랐네.”

라고 답장하는 남편의 말 뒤에 묻어 있는 피곤함이 먼저 보였다. 아침에 나가 밤늦게 들어올 남편의 하루가 떠올라 오히려 안쓰러웠다.

점심시간에 문득 생각했다.

'저녁 늦게라도 챙겨줄까?'

하지만 남편은 많이 늦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의 결혼기념일은 진짜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밤늦게 돌아온 남편은 씻고 바로 잠들었다. 이불을 덮어주며 생각했다. ‘결혼기념일이 이렇게 지나가도 뭐 어때.’ 신기하게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우리 관계가 미적지근해서가 아니다.

사랑이 식어서도 아니다.

단지 사랑의 온도가 달라진 것뿐이다.

예전의 사랑이 불꽃처럼 뜨겁고 빠르게 타오른 열정이었다면, 지금의 사랑은 삶을 버티게 하는 견고한 온기처럼 오래도록 머문다.

며칠 전 야근하고 들어온 남편이 내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오늘도 수고했어. 내가 집안일에 신경을 잘 못 쓰고 있네. 챙겨줘서 고마워.”

그 한마디가 꽃다발보다 더 좋았다.

신혼 첫해, 남편이 장미 100송이를 들고 온 날이 있었다. 설레고 행복했지만 꽃은 일주일 만에 시들었다. 하지만 “오늘도 수고했어”라는 말은 다르다. 시간이 지나도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꽃은 시들지만 진심은 시들지 않는다.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형태가 변한다.

처음엔 심장이 먼저 반응한다.

그 설렘이 있어 지금의 우리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함께 살아내는 시간이 쌓이면 사랑은 심장이 아니라 삶이 된다.


서로의 무게를 함께 드는 팀처럼

아침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이를 깨우고

저녁엔 “오늘은 뭐 먹을까?”를 묻고

주말엔 장을 보고 대청소를 한다.

거창하지 않지만, 이 일상이 우리의 사랑이다.

사소한 하루들을 함께 이어 붙이며 우리는 자연스레 한 집의 미래를 함께 그리는 사람이 되었다. 큰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같은 방향으로 살아가는 평생 친구가 되어가는 중이다.


결혼 12년.

이제는 안다.

사랑은 기념일이 아니라 함께 살아낸 하루에 있다는 걸.

뜨거움은 사라진 게 아니다.

시간이 지나며 깊어지고, 단단해져 서로의 삶을 버티게 하는 힘으로 자란 것뿐이다.

그리고 그 힘이 지난 시간을 지켜왔고,

앞으로 남은 삶까지도 서로의 곁을 지탱해 줄 것이다.

불꽃처럼 타오르지 않아도,

우리의 사랑은 삶 속에서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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