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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에게 찍히면서까지 양보하지 않은 한 가지

by 언어프로듀서


평소 같았으면 “죄송합니다”하고 바로 수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옳다고 믿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자료 검토도 안 하고 날 것 그대로 올리면 어떻게 해요?”


날 선 목소리들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가슴이 쿵 내려앉고 눈은 갈 곳을 잃었다. 순간, ‘내가 뭘 잘못한 걸까?’라고 스스로를 의심했다. 동시에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 흔들림을 들키고 싶지 않아 마음을 다잡았다.


며칠 전, 우리 팀 주관 부서별 협의회가 열렸다. 석 달 동안 학교 현장을 돌며 선생님들과 행정 직원들의 고충을 들었다. 이번 회의는 그 내용을 교육청에 전달하고 개선 방향을 찾기 위한 자리였다.


나는 현장의 목소리를 필터 없이 담았다.

“교육청에서 예산이 없다며 A사업을 미루고 있습니다. 그 부담을 학교에 떠넘기고 있어요.” 체념 묻은 이 말을 회의자료에 그대로 담았다. 세 달 동안 현장에서 본 어려움을 교육청 직원들도 함께 공감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 솔직함이 누군가에게는 ‘일거리’를 떠넘기는 공격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분위기는 빠르게 격앙되었고, 회의는 결국 결론 없이 끝났다.



자리에 돌아오니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렸다.

지나가던 동료가 말했다.

“그냥 적당히 걸러서 올리지, 왜 그렇게 솔직하게 올렸어..”


적당히.

그 ‘적당히’ 때문에 학교 목소리가 묻혀왔던 거 아닌가.

조직에서 적당히는 누군가에게는 방패지만 누군가에게는 절망이다. 불편한 진실을 덮으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건 변화다. “적당히 합시다”라는 말은 결국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나는 그 침묵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조직에는 이른바 국룰이라는 게 존재한다.

모두가 불편해하지 않을 선에서 침묵하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될 정도로만 적당히 말하는 문화. 정답으로 정해진 방향만 택하는 방식.


그날 나는 그 룰을 깼다. 그래서 무능력하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이상하게 후회는 없었다.

같은 조직에 있다고 해서 생각까지 같을 필요는 없으니까.



문득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한 장면이 떠올랐다.



파란 스웨터 하나로 조롱받던 앤디처럼, 조직에는 보이지 않는 문법이 있다. 그 문법에서 벗어나는 순간, 이상하고 불편한 사람이 된다.


나 역시 그 문법을 벗어났고, 그래서 더 비난받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앤디가 결국 자기 길을 선택했듯, 나도 그 순간 나의 목소리를 선택했다.



며칠 뒤, 학교 직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회의에서, 우리 이야기 전해줘서 고마웠어요. 교육청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게 의미 있어요.”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었다는 사실이 날 위로했다.


나도 알고 있다.

누군가는 나를 오해하고

누군가는 나를 불편해한다는 것을.


그래도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방향을 택할 것이다.

모두에게 사랑받기 위해 나의 소신을 저버린다면, 내 인생의 운전대는 남의 손으로 넘어가 버린다.


나를 지킨다는 건,

때로는 비난받을 자리에 서더라도

나에게 중요한 가치를 선택하는 용기다.


그 작은 용기들이 모여 결국 내 삶의 방향을 만들고,

누구에게도 운전대를 빼앗기지 않을 힘을 길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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