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을 하며 돈맛을 본 내가 모든 적을 섬멸하겠다는 기세로 불타오르던 때, 앞 부동산 가게에 한 아줌마가 나타났다.
같은 건물 한 칸 건너 부동산은 눈 안에 가시 같은 존재, 이른바 라이벌이었기에 더 신경이 쓰였다
내 나이 또래의 날렵하고 억세게 생긴 아줌마였는데, 딱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인상이었다.
우리는 그녀를 왕실장이라고 불렀다
나와 친구는 환상의 콤비로서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해나갔으나, 건너편 왕실장 또한 장난 아닌 성격의 소유자였다. 싸움꾼이라기보단 수단꾼이었는데, 전직이 포항 과메기 장사였다고 하니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다(과메기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장사를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거침이 없었고, 왕실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람 상대한 전적이 있어서 인지 친화력은 대단했다. 우리같이 직장 생활하던 사람이나 집순이로 장만 보던 사람하고는 급이 달랐다.
왕실장은 동네를 활개치고 다녔고, 얼마 안 가 그 바닥에서 왕실장 모르면 간첩이라 할 정도로 유명세까지 탔다. 워낙 억세고 힘이 좋은 상대라 버거웠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앞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선수를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손님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일을 했다.
하루는 우연히 화장실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머리 손질을 하고 있는 왕실장을 보았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궁금해서 그이의 부동산을 들여다보니 왕실장 책상을 가운데 두고 대략 6명-7명 사이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왕실장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뭐지? 왕실장은 머리를 다듬고 콧노래를 부르며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그런데 웬걸. 왕실장은 들어가지 않았다.
손님 사이에 머리 아픈 송사가 생기니 알아서들 해결하라며 두고 나와버린 것이다.
‘와... 참 대단한 멘탈의 소유자네.’
나는 여러 가지 의미로 왕실장을 다시 보게 되었다.
하루는 동네 관리소장이 온 동네를 뒤지며 왕실장을 찾고 있었다.
경찰까지 와서 난리를 피는 꼴을 본 우리는 ‘왕실장이가 또 무슨 사고를 쳤구먼’ 했다. 평소에 사고를 치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어느 임대인이 나한테 와서 무슨 정리를 부탁했다. 왕실장이 모든 돈은 지 앞으로 받아서 처리한다며, 계산 좀 다시 해봐 달라는 청이었다.
이후 얼마 안 가 왕실장은 자취를 감추었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큰 사고를 쳐서 부동산을 옮긴 모양이었다. 알고 보니 이전 직장에서도 물의를 일으켜 소속을 옮기곤 했던 모양이다.
몇 년 후, 나는 다른 곳에서 일을 하는데 손님인 척 들어와 정보를 캐려는 두 여자가 찾아왔다.
왕실장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뒤 놀라서 인사만 하고 뛰쳐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한국 사람들 참 정이 많다고. 저치가 아직도 저런 상태로 잘 싸돌아다니며 사는 걸 보니 말이다.
죄의식이 없는 사람은 참 위험하다.
그런 사람 옆에 있으면 언제나 손해가 따른다.
내가 처음 부동산을 한다고 했을 때, 엄마가 ‘부동산은 사기꾼들이나 하는 거다’라고 하시던 말이 떠오른다.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왕실장이나 그 외 위험한 사람들을 많이 접하고 난 지금은 왜 그런 말을 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 이렇게 말해주고 싶기도 하다.
“그래도... 나 같은 사람도 많아요 엄마.”
라고. 이 세상은 양심 버린 사람들로 가득 차 있지만, 그래도 나처럼 양심 지키며 일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자뻑이라고 핀잔 들을 일이지만 어쩌겠나. 사실인 걸.
오늘도 이렇게, 웃어넘기고 만다.
2022.04.14.
드레스룸 한 귀퉁이 나만의 공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