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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후 Dec 18. 2023

시, 시. 시자로 시작하는 말 시금치와 시댁

씹을수록 단맛이 납니다

헌  신이 되는 헌신을 때려주는 시금치




독박과는 나도 모르게 언니동생하며 살고 있었다. 시나브로 가랑비처럼 마음이 젖는 줄도 모른 채.


나는  성인이 된 후 경제적 독립을 했다. 정신적 독립은 사실 그 이전부터 했을 것이다. 나는 독립적인 인간임으로 남과 여로 만난 지기 또한 독립적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댁 식구와 불편한 관계로 '시'자가 들어가는 시금치도 싫어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릴 땐 야채가 맛있는 줄 미처 몰랐는데, 지금은 나물류를 꽤 잘 먹는다.

나물류 요리를 완성하기까지는 다듬기, 씻기, 데치기, 삶기, 물 빼기, 무치기, 양념과 조물조물하기 등 참으로 공정이 많이 간다. 씹을수록 단물이 나오는 것 같은 나물을 저렴하게 실컷 먹을 수 있는 비빔밥은 질리지 않아 보리밥, 꽁보리밥, 본죽을 자주 드나든다.


매일 손에 물 묻히는 주부이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요리를 잘하는 편이 아니다. 돈 벌기 힘들다고 나의 사랑하는 하늘 선물은 내게 집안일을 시키지 않았으며, 손에 물 또한 묻히게 하지 않으셨다. 심지어는 속옷까지도 빨지 못하게 하셨다. 시집가면 평생 해야 하는 일이라면서.


요리는 못해도 책임과 의무는 잊은 적 없는 나는 신랑의 아침을 단 한 번도 굶긴 적이 없다. 비록 나는 굶고 출근하더라도. 일가정 양립하는 과정이 출산 전까지는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므로 할 만했다. 그러다 아이가 생겼다.


첫째까지는 하늘선물의 무한한 사랑의 힘으로 나는 일가정양립을 약간의 불만은 있었지만 금세 떨쳐버리고 둘 다 집중하며 병행할 수 있었다. 그러다 둘째가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다. 계획임신인 첫째와는 달리 성격이 급해 스스로 찾아온 것이다.


자기 닮은 아이가 태어나고 시댁에서도 기저귀를 들춰보고 환호했다. 참 아들이 그렇게 많은 집안이 또 이렇게 아들을 좋아한다. 양가가 대만족, 신랑 또한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므로 우리는 이쯤에서 둘 만 키우기로 약속 아닌 약정을 맺었다.


그도 나도 한 사람의 인간을 키워내는 일에 서툴고  미숙하여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서로가 부모로서 부족함을 깨달았고 아이들에게 미안했고 서로가 서로보다는 아이들에게 집중된 생활로 접어들었다.


우린 원래 날씬한 몸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아이들 또한 잘 먹는 것에 비해 살집이 없었다. 뭐가 힘들다고 나도 버티는데.....

그가 날씬하다 못해 말라갔다. 그것이 못마땅한 나는

"미스코리아 대회 나갈 거야?"

"당신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각선미가 점점 빼어나길래. 허리는 왜 한 줌이고."

"그러니까 나한테 관심 좀 가지라고"

"어떡해? 안 되겠다! 밤에 라면을 먹고 자는 건 어떨까?"

"그럼 숙면을 취할 수 없겠지. 소화시키느라."

"아무튼 더 이상 살 빼지  마셔. 위험해. 해주는 밥 많이 드시고".


그날이 왔다. 조부님 기일은 왜 늘 동장군이 꽁꽁 얼리시는지 모른다. 퇴근 후 시댁에 갔다. 큰 형님이 얼추 준비는 해 놓으셨다. 나는 설거지 하나만큼은 혀를 내두르게 잘할 수 있다. 요리는 썩 잘하지 못해도 목기에 담는 건 그나마 잘한다.  


지방을 태우고 탕국을 퍼 담았다. 식사를 하고 뒷정리를 하면 각자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둘째 아주버님이 말씀을 꺼내신다. 신랑이 마른  것 같지 않냐고. 큰 형님은 가만히 있다 보태는 말을 투척한다. 신랑 밥 안 해 주는 거 아니냐고.

너무 말랐다는 거다. 나는 가만히 있으려니 억울하다. 나도 말랐는데.... 만일 내가 살이 붙었으면 이 사람들, 나만 밥 먹었냐고 할 태세다.


큰 아주버님이 조용히 분위기를 가른다. 아니 왜 밥을 제수씨가 해 줘야 하나. 너는 네 밥을 네가 해 먹으면 되지.

네가 먹고 싶은 거 네가 당기는 음식 할 수 없으면 사 먹고 들어가면 되지. 너도 제수씨도 일하느라 힘든데.....

"야, 너 내일부터 네 밥 네가 챙겨 먹어. 제수씨, 내일부로 얘

밥 해주지 마세요. 입이 짧아서 그동안 제수씨가 힘들었죠?

애썼어요. 이제 얘 밥에서 해방되세요."


이런, 갑분싸!

분위기가 이상야릇해졌다. 앞서 말한 두 사람의 표정이 묘하고 웃겨서 사진에 저장하고 가끔  보면 힐링되겠다 싶었다. 가만히 듣고 계서던 작은 아버지까지 별안간 합세하신다. 당신도 몇 년 전부터 밥하고 국을 끓여 드신다나.


빙판길을 거북이같이 느릿느릿 조심해서 운전했다. 귀가한 후 그에게 시댁에서의 대화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웬일로 이제까지 가정에 충실하고 밥 해 주느라 고생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자기 밥은 하지 말되 아이들 밥은 성인 될 때까지 해 주라고 말이다.


나는 시금치로 대변되는 시댁 식구들에 의해 자유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그를 위한 주방에서 해방되었다. 그는

실천 휴머니즘에 의해 스스로 밥을 챙겨 먹고 있다. 가끔 불쌍해 보여 내가 솜씨를 부린 식사를 제공하면 그는 감동받아 눈이 글썽글썽하는 듯하다.


나는 시금치를 싫어하지 않는다. 아니 시금치는 된장국으로 먹으면 구수하다. 데쳐서 무쳐 먹으면 식감이 좋고, 씹을수록 단맛이 난다. 파스타에 넣으면 건강까지 함께 씹어먹을 수 있다. 헌신하면 그것은 권리란 헌신짝으로 돌변해 고마운 줄 모른다. 어쩌다 해 줘야 감격하고 고마워 표현할 줄 안다. 나는 시댁 식구와 허물없이 잘 지내고 있다. 가끔 서운한 감정이 올라올 때에는 건강을 위해 된장에 풀을 죽여 말아먹는다. 밥을 넣고 오물오씹어  삼킨다.


책을 출간한 뒤 책을 궁금해한다. 대가족이라 한 박스 가져다주었더니  각자 준비라도 한 듯 격려금을 주었다. 두 아주버님과 형님은 전원 풍경이 살아있는 세컨드 하우스를 개방해 언제든지 문인들과 방문하면 삼겹살과 맥주는 쏘겠다는 말로 나의 글쓰기를 독려한다.


시, 시, 시자로 시작하는 시금치, 시작, 시선, 시인, 시론, 시낭송..... 나는 시자로 시작하는 시댁도 좋아한다. 눈치 없게 핵폭탄을 터트리는 전쟁과도 같은 생활 속에서도 포탄을 막아주는 눈치 빠른 이가 있기 때문이다. 뒤에서 얻어맞고 앞에서 치료받는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  와중에 나는 운이 좋은 것 같다. 얻어맞기만 하고 치료받지 못하는 이가 있는 줄 알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생활에 쪼들리거나 너무 편안한 일상에서는 詩가 나오기 힘들다는 S 시인의 말씀이 생각난다. 시난고난한 일상에서 누구나 작고 큰 십자가를 짊어지고 산다. 나는 과거 그 십자가에 얽매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부정을 양산한 적이 있다. 내려놓기까지는 정서의 높은 파고를 온몸으로 맞아야만 했다. 그 수련에도 불구하고 여태 내려놓지 못한 최후의 보루가 있다.


시금치가 조금도 힘을 보태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전우애로 나의 정서를 돌봄 해 주지 않았나 싶다.

때론 채찍질로 다 그렇게 산다고 질책하고, 때론 힘들지라고 따뜻한 손으로 등을 쓸어주었다. 그니보다 어쩌면 시금치와 더 돈독한 관계로 성장하지 않았나 술회해 본다.


♤사진 출처 : 네이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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