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밤은 죄가 없습니다
얼마 전 문학상을 수상하신 시인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실례가 안 되냐는 정중한 목소리는 젊었고
진중했으며 열정적이었다.
전화를 받는 내가 보이진 않겠지만
조신해졌고, 詩라는 공통분모는
밤이라는 아우라도 시력이랄 수 없는 보잘것없는
이력에도 굴하지 않고 단전이 뜨거워졌다.
나는 능력이 없어 멀티어가 될 수 없다.
올해 뜻하지 않게 짧은 시력에도 불구하고
두 권의 시집을 출간했고, 뜨거운 여름을 에어컨 가동하지 않은 밤으로 활활 소진했다.
나는 문학회라고 할 단체에 딱 두 군데를 가입한 상태이다. 詩로 하나, 수필로 협회와 작가회에 소속되어 있다. 좋은 분들이 활동하는 문학회 가입을 권하셨다.
고민이다. 사실 요즘 글 다운 글을 쓰지 못하고 있기에.
작년과는 아주 딴판이다. 샘솟는 에너지가 말라붙었다.
신춘문예에 응모하잔 연초의 계획도 무산될 판. 가까스로 몇 편 지어 두 군데 신문사에 응모할 수 있었다.
문지, 문동 위주의 시집과 달마다 찾아오는 시집과 수필을 골라서 읽고, 민음사 전집을 가끔 읽고 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호모데우스, 제언은 고양이 눈물만큼씩 가끔 읽고 있다. 쓸 수 없다면 채우는 시간으로 만드려 한다.
데드라인은 내게 조임이면서도 쓸 수 있게 하는 분화구 같다. 기간이 정해지니 그 임박한 순간이 다가올수록 머릿속에 가득 찬다. 그러다 톡 터진다.
쓸 수 없을 것 같은 초심이 쓸 수 있는 감각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나는 시인님께 나의 현상을 말씀드렸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보자는 말씀으로 통화를 마쳤다. 다음날 톡이 왔다. 시인님이 막 지은 시가 올라오고 신작 시를 올려보라고. 어쩔까. 신작시라? 지으면 되겠네.
퇴고는 모르겠다. 스스럼없이 올리는 내가 좋았을까. 어땠을까.
내가 아는 또 다른 시인을 초대해서 같이 톡으로 詩로 소통해 보면 어떻겠냐는 조심스러운 제안을 하셨다.
톡이라면 부담 없이 詩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에서 둘 그리고 셋이 된 우리는 당일 두 편씩 詩를 주고받으며 합평을 하였다.
열정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불꽃이 튀는 것 같다.
글 재는 있어도 에너지가 달려 못 쓰고 있던 글을 다시 시작해 보자. 겨울은 이제 시작이고 겨울밤은 깊다.
내 글도 깊어가면 좋겠다.
잠이 엄청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