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변신>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 중에 가장 이상적인 사랑이 스테르고 사랑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이며, 개가 주인을 향한 사랑, 통치자의 백성을 향한 사랑이 스테르고 사랑이다. 다른 말로 헌신이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자기 자식은 사랑하게 마련이다. 물론 예외는 언제나 존재하지만 통칭 그렇다는 말이다. 부모가 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이면서 끊임없이 베풀고, 요구하지 않는 사랑이다. 양육이라는 그 어려운 과정을 온전히 감당하게 하는 사랑이다. 부모가 되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말이 있다. “자식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 정말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플까? 절대 아니다. 무조건 아프다. 우리 큰 딸은 내가 방에 누워 있으면 가끔씩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머리카락을 밟아서 아프게 하기도 하고, 한 번은 손톱으로 내 뒷목을 고양이처럼 할퀴어서 상처를 낸적도 있다. 무방비 상태에서 한 발길질에 눈이라도 한 대 얻어 맞으면 나도 모르게 욱한다. 그런데 왜 자식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 했을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눈일까? 콧구멍이나 귓구멍도 있고 입도 있다. 아무튼 얼굴의 어느 구멍이든 넣으면 아프다. 어느 날 두 딸들이 같이 놀고 있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다. 둘 다 너무 귀여워서 마음이 몹시 흡족했다. 아이들을 보고 있는 내 눈이 참 즐거웠다. 그 때야 알았다. 애들이 너무 예뻐서 늘 눈에 그 예쁜 모습을 담아가고 싶은 마음이구나… 그래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고 그랬구나… 작가는 가정의 의미에 대해서 여러 철학자의 정의를 들며 이렇게 설명한다.
가정이란 사람이 그의 ‘어떠어떠함’, 곧 외모나 성격, 재능 또는 재산 등등 때문에 인정받고 사랑받는 장소가 아니라 그의 존재 곧 자신의 ‘있음 그 자체’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장소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으로써 존재의 기쁨을 맛보는 장소라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아마도 가정의 본래적 기능이 이러해야 함을 말한 것일 텐데 자본주의는 이러한 가정의 순기능을 교환 가치로서 평가하게 만들었다. 부친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좋은 아빠와 나쁜 아빠로 평가 되고, 자녀의 성적에 따라 부모에게 자랑스러운 자녀와 어디 내세우기 부끄러운 자녀가 된다. 교사인 아버지가 누나와 자신의 성적을 비교하며 문제를 지적하자 10대인 아들이 그 앞에서 아파트 창문으로 뛰어가 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다. 생각만으로도 섬뜩한 일인데 한 인간이 가정에서 조차 그 존재를 인정 받지 못한다는 것은 세상 어디를 가도 안식할 곳이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너무 많다. 이런 안타까운 가정 현실을 극단적 가정을 통해서 해서 나타낸 작품의 하나로 카프카의 <변신>이 있다.
주인공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에 자기가 흉측한 곤충으로 변한 것을 알게 된다. 이런 그를 발견한 가족들은 놀라고 슬퍼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에는 가족들이 그레고르를 인내하며 돌보게 된다. 차츰 보살핌의 시간이 길어지자 가족들은 이 곤충을 없애 버려야한다고 생각한다. 전에는 가족의 생계를 돌보던 오빠였지만 이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벌레 한 마리일 뿐이었다. 그레고르는 결국 죽게 된다. 가족들은 그의 죽음 앞에서 신께 감사하고 가족 소풍을 간다. 그리고 이제 성년이 된 딸이 가족의 생계를 이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즐거워한다.
극단적인 과장이 들어간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병든 부모를 버리고 간 이야기나, 신생아를 버린 부모, 그 동안 벌었던 많은 돈을 부모와 형제들이 다 탕진하고 결국 소송에 들어간 연예인들 이야기 등 이런 가족에 대한 이야기들이 우리 주면에서 간간히 들려온다. 10년 동안 치매를 앓던 부모를 끝까지 성심성의 껏 돌볼 자신이 있는가?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이런 문제에 있어서 누구도 자신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인간의 취약함에 자본주의의 악령이 강림하게 되면 문제는 증폭 된다.
부르주아지는 가족관계 위에 드리워진 그 감동적인 감상의 포장을 찢어버리고, 그것을 순전히 금전관계로 만들어버렸다.”
-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 인간 다움을 회복하는 것, 즉 구원에 이르는 것은 가족과 같은 진실한 관계의 회복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저자는 철학자 마르셀의 주장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마르셀은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는 부버를 따라, ‘가족’과 같은 상호적 관계의 개념이 ‘나’ 같은 주관적 개념보다 언제나 앞선다고 강조합니다. 내가 있어서 가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있어 내가 있는 것이며, 내가 있어 가정의 의미와 가치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가정이 있어 내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생긴다는 거지요. 그래서 가정은 그 자체가 ‘존재의 화신(l’incarnation)’이자 ‘하나의 신비’이고 ‘존재의 힘’이며, ‘긍지(la fiert)의 산실’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가정은 내 존재보다 앞선 개념이며 나란 존재는 가정을 통해서 정의 된다는 말이다. 결국 가정이 올바르게 형성되면 내 존재의 근거가 탄탄해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안타까운 것은 올바른 가정의 모습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부모가 많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부모가 어린 시절 가정 내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성년이 된 후에도 트라우마로 간직하고 있다. 이런 부모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자녀에게 되물림하는 경우가 많다. 가정의 태생적 한계에 의해서 가정 내에서는 부모의 역량이 지배적인데 아무도 완전한(?) 부모를 경험한 적도 없고 자녀의 도리는 교육을 통해서 많이 배우지만 부모의 도리에 대해서는 본능 또는 경험에 의존하게 된다. 최근에는 쏟아지는 육아서적들을 보면서 올바른 부모의 역할을 학습하고자 하는 노력이 개인적으로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긍정적이다. 한 가정을 타고 흐르는 저주처럼 나의 아픔을 되물림 하지 않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 나 자신은 물론이고 자녀의 정체성에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야한다. 문제는 항상 부모인 경우가 많은데 상대적 약자인 자녀에게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