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친구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나는 납득이 안 되는 거야. 나는 항상 이미지로 상황을 그려보고, 그 입장이 돼서 따져보거든. 내가 개라면? 불이 붙었다면? 내가 술이 취했다면? 그래서 따박따박 따져 묻지.
‘에이. 선생님 말도 안 돼요. 들판이 다 타는데, 어떻게 그 사람만 안 죽어요? 개가 물 적셔 비빈다고 어떻게 불이 안 붙어요? 연기 때문에 질식해서 먼저 죽지 않나요? 그 개도 그래요. 냇가에서 물 묻히고 뒹구는 것보다 주인을 물어서 냇가로 끌고 가는 게 낫지 않아요?’”
“도발을 하셨군요. 반론 제기는 우리나라 교실에서 허용이 안 되는데요.”
“그러니 선생님들은 얼굴이 죄다 벌게져서 나한테 화를 냈지.
‘이 고얀 놈, 네가 선생님을 놀리는구나.’
이걸 이해해야 하네.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도,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는 저편의 세계, something great가 있다는 거야. 지혜자만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네. something great를 인정하고 겸허해지는 것은 머나먼 수련의 길이야
“한밤의 까마귀가 안 보이더라도 한밤에 까마귀가 어딘가에는 있어. 그렇지? 어둠이 너무 짙어서, 자네 눈에 안 보이는 것뿐이야. 그리고 한밤의 까마귀는 울기도 하겠지. 그런데 우리는 그 울음소리도 듣지 못해. 이게 선에서 하는 얘기라네. 한밤에 까마귀는 있고, 한밤의 까마귀는 울지만, 우리는 까마귀를 볼 수도 없고 그 울음소리를 듣지도 못해. 그러나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 분명히 한밤의 까마귀는 존재한다네. 그게 운명이야. 탄생, 만남, 이별, 죽음…… 이런 것들, 만약 우리가 귀 기울여서 한밤의 까마귀 소리를 듣는다면, 그 순간 우리의 운명을 느끼는 거라네.”
“결정된 운이 7이면 내 몫의 3이 있다네. 그 3이 바로 자유의지야. 모든 것이 갖춰진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 그게 설사 어리석음일지라도 그게 인간이 행사한 자유의지라네. 아버지 집에서 지냈으면 편하게 살았을 텐데, 굳이 집을 떠나 고생하고 돌아온 탕자처럼…… 어차피 집으로 돌아올 운명일지라도, 떠나기 전의 탕자와 돌아온 후의 탕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네. 그렇게 제 몸을 던져 깨달아야, 잘났거나 못났거나 진짜 자기가 되는 거지. 알겠나?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수만 가지 희비극을 다 겪어야 만족하는 존재라네.”
“…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 …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산 게 아니야. 스토리텔링이 럭셔리한 인생을 만들어. ‘세일해서 싸게 산’ 다이아몬드와 첫 아이 낳았을 때 남편이 선물해준 루비 반지 중 어느 것이 더 럭셔리한가? 남들이 보기엔 철 지난 구식 스카프라도, 어머니가 물려준 것은 귀하잖아. 하나뿐이니까. 우리는 겉으로 번쩍거리는 걸 럭셔리하다고 착각하지만, 내면의 빛은 그렇게 번쩍거리지 않아. 거꾸로 빛을 감추고 있지. 스토리텔링에는 광택이 없다네. 하지만 그 자체가 고유한 금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