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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둥 May 30. 2022

당신은 존재했나요?

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당신은 존재하고 있나요?

모든 인생들에게 가장 공평한 사실이 하나가 있다면 죽음이라는 것이다. 삶을 어떤 모양으로 살았든지 우리는 모두 죽는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덕을 아무리 많이 쌓았더라도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는 위업을 세우고 자신의 소멸이 안타까워서 불로초를 찾아서 헤매었지만 결국은 죽었다. 이상한 것은 죽음은 우리에게 이토록 가까운 것임에도 살면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쩌면 인생을 인생답게 살기 위해서 가장 진지하게 오랜 시간 탐구되고, 일상적인 대화에서 늘 회자되어야 할 주제인데 가장 큰 기피 대상이 죽음이다. 이러한 우리의 무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죽음은 여전히 모든 인생의 지향점으로 남아있다. 어쩌면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죽었다는 것은 살았다는 것의 반증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관심이 기피대상으로 전락하므로 인해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살아가는 길을 잃었다. 삶의 구심점을 잃었다는 말이다. 간단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죽음 앞에서는 지금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대부분이 삶의 부산물이고 정말로 중요한 삶의 가치는 소외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선로를 벗어난 기차처럼 방황하고 있는 현대의 유목민들을 죽음을 향한 선로로 복귀시켰을 때 어떤 고귀한 가치들이 우리에게 남겨질까? 죽음을 기다리며 마지막 말들을 남긴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삶을 되돌아봤으면 좋겠다.

생전에 대한민국의 지성이라고 일컬어지던 이 분의 죽음은 그 명성만큼이나 남달랐던 것 같다. 당신이 긴 세월을 경험하면서 쌓아온 지혜를 작가와의 대화 속에서 많이 담아 두고 전하고 싶으셨나 보다. 하지만 인터뷰 내용을 글로 남기더라도 그대로 옮기지 말라는 당부가 의미심장하다. 작가의 입장에서 듣고 여러 말들 중에 선별하며, 작가의 생각으로 선생의 마지막 말들을 담으라고 하셨다. 이런 당부를 생각했을 때 작가는 과연 선생의 의도를 잘 반영해서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서 책을 출판한 것인지 아니면 최대한 선생의 말들을 그대로 담으려고 노력했는지 인터뷰의 모든 내용을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너무나도 광범위한 주제를 두고 이렇게 독창적이고 깊이 있는 대화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부러웠고, 고인이 가진 지혜의 부스러기라도 흘려버리지 않기 위한 작가의 긴장감이 느껴져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은 죽음 앞에서 고난, 행복, 사랑, 용서, 꿈, 돈, 종교, 죽음, 과학, 영성 등 너무나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대화한 내용이기에 리뷰를 남기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럽다. 마치 바다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속에 사는 수많은 생물 하나하나를 설명할 수 없듯이, 책의 내용을 정리하고자 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지혜의 향연에 즐겁고 특정 주제를 정할 수 없음에 난감하다. 그래도 한 가지 관점을 선택해야 한다면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이 살아갈 날이 많은 이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마도 삶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당부가 아닐까 싶다. 내가 이렇게 살아봤더니 실패 혹은 성공했고, 너는 나처럼 혹은 나와 달리 이렇게 살면 만족스러운 죽음을 맞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되어서 관련된 몇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 자기 머리로 생각하라

이 책의 모든 내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하면 바로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일 것 같다. 왜냐하면 이 한 문장이 선생의 전 인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첫 번째 이유는 남들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대중의 생각이 진리인냥 그대로 수용하는 것에서 부조리가 시작된다. 스스로 가치를 특정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따라 사는 삶의 틀을 깨는 출발점이 자기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살면서 다른 사람의 생각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만만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가 하는 말을 유심히 듣고 그것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수 많은 질문을 수반한다. 문제는 우리의 문화가 이 질문이라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질문은 곧 자기 생각에 대한 반론이라 치부하고 상대방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친구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나는 납득이 안 되는 거야. 나는 항상 이미지로 상황을 그려보고, 그 입장이 돼서 따져보거든. 내가 개라면? 불이 붙었다면? 내가 술이 취했다면? 그래서 따박따박 따져 묻지.
‘에이. 선생님 말도 안 돼요. 들판이 다 타는데, 어떻게 그 사람만 안 죽어요? 개가 물 적셔 비빈다고 어떻게 불이 안 붙어요? 연기 때문에 질식해서 먼저 죽지 않나요? 그 개도 그래요. 냇가에서 물 묻히고 뒹구는 것보다 주인을 물어서 냇가로 끌고 가는 게 낫지 않아요?’”
“도발을 하셨군요. 반론 제기는 우리나라 교실에서 허용이 안 되는데요.”
“그러니 선생님들은 얼굴이 죄다 벌게져서 나한테 화를 냈지.
‘이 고얀 놈, 네가 선생님을 놀리는구나.’

이렇게까지 미움을 받아가면서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삶은 정말로 좋은 것일까?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기 일수고 이런 류의 사람은 늘 기피대상이 된다. 이런 삶의 외로움은 말할 것도 없지만 타인의 생각에 따라 사는 삶도 허무하고 외롭기는 마찬가지 아닐까? 샤르트르의 <구토>를 읽으면서 과연 현실에서 실존하는 사람은 어떤 모습일지 주변에 그런 인물들을 상상해본 적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에 끌려다니거나 타인이 설정한 방향에 동조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찾기 힘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찾던 한 사람이 여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행인 천 명이 모이면 천 가지 생각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의 생각이 인생의 가치를 특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가 가진 생각의 꽃을 피우지 못하고 타인의 생각을 내 몸에 접붙인다. 그리고 마치 내 것인냥 스스로를 속인다. 이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 모두에게 공평하듯 삶은 각자에게 주어진 선물인데 내 삶에서 내가 들러리로 살아갈 이유는 없다. 사람들과 잘 어우러져 살기 위해서 내부에서 솟구치는 의문들을 무시하는 삶은 자신의 생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으로 인해서 사람을 방황하게 만든다. 해결되지 않은 의문은 자신을 찌르는 송곳이 되기 마련이다. 죽을 때까지 내 안의 의문을 모른 체 하고 살 것인지, 피곤하더라도 하나하나 따지면서 살 것인지 개인의 선택이다. 내가 존재하면서 살지 존재를 흉내 내면서 살지는 결국 마음가짐인 것이다.

 

-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다

철저하게 자기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운명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쩌면 많은 내적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자기 생각을 가진다는 것은 인생에서 독립성을 의미하게 마련인데 그런 사람이 운명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정말로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자세히 인생을 살펴보게 되면 운명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철학자였던 소크라테스도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 믿었다.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 가장 큰 지혜인데 사람들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소크라테스야 말로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걸 이해해야 하네.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도,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는 저편의 세계, something great가 있다는 거야. 지혜자만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네. something great를 인정하고 겸허해지는 것은 머나먼 수련의 길이야

운명이 존재한다는 전제에서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 혹은 사명이 무엇인지 살펴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책에서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을 느끼는 것은 한 밤에 우는 까마귀를 보는 것과 같다고 한다.

“한밤의 까마귀가 안 보이더라도 한밤에 까마귀가 어딘가에는 있어. 그렇지? 어둠이 너무 짙어서, 자네 눈에 안 보이는 것뿐이야. 그리고 한밤의 까마귀는 울기도 하겠지. 그런데 우리는 그 울음소리도 듣지 못해. 이게 선에서 하는 얘기라네. 한밤에 까마귀는 있고, 한밤의 까마귀는 울지만, 우리는 까마귀를 볼 수도 없고 그 울음소리를 듣지도 못해. 그러나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 분명히 한밤의 까마귀는 존재한다네. 그게 운명이야. 탄생, 만남, 이별, 죽음…… 이런 것들, 만약 우리가 귀 기울여서 한밤의 까마귀 소리를 듣는다면, 그 순간 우리의 운명을 느끼는 거라네.”

평소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지만 관심을 기울이고 나의 걸어왔던 인생길을 찬찬히 살펴보면 운명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는 왜 오늘 이 사람을 만났으며, 이런 일을 하게 되었으며 왜라는 의문을 가지고 내가 그려온 인생의 궤적을 쫓아가다 보면 운명이 아니고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운명 앞에서 선 개인에게 의지라는 것은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 생활 속에서 우리가 매 순간 하는 선택은 내 운명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결정된 운이 7이면 내 몫의 3이 있다네. 그 3이 바로 자유의지야. 모든 것이 갖춰진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 그게 설사 어리석음일지라도 그게 인간이 행사한 자유의지라네. 아버지 집에서 지냈으면 편하게 살았을 텐데, 굳이 집을 떠나 고생하고 돌아온 탕자처럼…… 어차피 집으로 돌아올 운명일지라도, 떠나기 전의 탕자와 돌아온 후의 탕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네. 그렇게 제 몸을 던져 깨달아야, 잘났거나 못났거나 진짜 자기가 되는 거지. 알겠나?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수만 가지 희비극을 다 겪어야 만족하는 존재라네.”

성경 속의 탕자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운명에 의해 각자의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지만 자신이 서있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 자리를 잠시 떠나는 방황은 필연적인지도 모른다. 여행을 가서야 내 보금자리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듯이 우리의 자유 의지는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도구가 되어서 우리를 방황하게 만들고, 깨닫게 만드는 절묘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운명과 자유의지는 서로 대립되는 관계인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결국은 개개인의 인생을 운명의 방향으로 수렴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란 운명을 깨닫기 위한 여행이 되고 이것이 지혜의 출발이 되는 샘이다.

 

-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다

요즘 다섯 살짜리 큰 딸은 그림책을 펴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놀이 중에 하나다. 아직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아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상당히 재미있다. 이야기가 앞뒤가 없고 허무 맹랑하며 심지어 그림책의 진짜 내용은 안중에도 없다. 그림을 보면서 그때 그때 떠오르는 이야기를 즉석에서 지어서 입으로 쏟아내는 것이다. 가끔씩 꽤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내서 혹시 천재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지만 절대 그럴리는 없다. 이야기라는 것은 어린아이에게도 성인에게 매력적인 것이다. 친구들이 모였을 때 경험담을 그럴듯하게 잘 풀어내는 친구는 그날 모임의 주인공이 된다. 저자는 럭셔리한 삶이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 …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산 게 아니야. 스토리텔링이 럭셔리한 인생을 만들어. ‘세일해서 싸게 산’ 다이아몬드와 첫 아이 낳았을 때 남편이 선물해준 루비 반지 중 어느 것이 더 럭셔리한가? 남들이 보기엔 철 지난 구식 스카프라도, 어머니가 물려준 것은 귀하잖아. 하나뿐이니까. 우리는 겉으로 번쩍거리는 걸 럭셔리하다고 착각하지만, 내면의 빛은 그렇게 번쩍거리지 않아. 거꾸로 빛을 감추고 있지. 스토리텔링에는 광택이 없다네. 하지만 그 자체가 고유한 금광이지.”

외적으로 드러나는 빛이 없지만 스토리텔링 자체가 고유한 광택이란다. 이때의 이야기가 꼭 희극일 필요는 없다. 이어령 선생도 자녀와 손자를 먼저 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그것을 통해서 깨달음의 글을 남기시기도 했고 비극이지만 결국 인생의 좋은 자양분으로 승화된 것이다. 인생은 하루하루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임에 틀림없다. 살아가는 동안에 이야기가 없는 시간은 없다. 다만 그 이야기들을 가치 있게 찾아내는 혹은 인지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치 있는 이야기는 관계에서 나온다. 그것이 갈등이든 사랑이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성찰을 이루게 되고 자신을 비워가는 과정에서 가치 있는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여러모로 생각해 볼만한 좋은 내용들이 많은 책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대화의 주제가 광범위하고 그 주제 하나하나가 단권의 책으로 다루어져야 하는 내용임에도 짧은 대화 속에 국한되다 보니 다소 어렵거나 더 알고 싶은 부분들이 종종 있다. 선생의 연세를 생각하면 젊은 사람의 입장에서 구태의연한 책일 것 같은데 인식의 틀을 깨는 선생의 독특한 시선과 인생과 세계에 대한 통찰의 면면은 사이다처럼 청량감을 주고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즐거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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