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레 Aug 30. 2022

자간과 장평, K-직장인의 업무능력

AI, 이것좀 부탁해



회사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축키

Alt+Shift+N




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축키는 무엇일까? 


망설임 없이 떠오르는


Alt+Shift+N


Alt+Shift+N이라는 단축키만 보고도 이게 뭘 뜻하는지 느껴진다면 당신은 K-직장인일 확률이 높겠네요. 이 단축키는 한글과 컴퓨터에서 자간을 줄이는 기능을 가진 단축키다. 자간을 원하는 만큼 조정하기 위해서 Alt+Shift+NNNNNN을 눌러야 한다. 그러다 혹시 너무 줄어들었다 싶을 때는 Alt+Shift+W 혹은 Alt+Shift+WWWWW. 그렇게 예뻐 보이는 문장 모양이 완성될 때까지 앞의 과정을 반복해주어야 한다. 


자간 조정 전


모든 직장인이 다 자간 조정의 고통을 겪는 건 아닐 테지만, 한글과 컴퓨터를 사용하는 조직이라면 이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위 표 안에 들어있는 문장을 보고 바로 손가락이 반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Alt+Shift+NNN


자간 조정 후





홀쭉해진 문장



2년 차 때 인턴이 부서에 들어왔다. 선배는 인턴에게 ‘문장, 단어가 끊기지 않게 한 줄에 들어가도록 보고서를 작성’하라고라고 했다. 문장이 ‘한 줄’ 안에 들어간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우리가 문장을 쓰다 보면 단어가 끊긴 채 다음 줄로 넘어가곤 한다. 한 장짜리 보고자료를 작성할 때는 가급 정 단어가 끊어지지 않도록 쓰라고 배운다. 


인턴은 한참 동안 보고자료를 작성하고는 선배에게 가져갔다. 선배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보고자료를 나에게 가져왔다. 사수인 내가 한번 직접 보라고 말이다. ‘응? 문장이 뭔가 이상했다’. 특정 글자들만 홀쭉해져 있었다. 


<예시>

단어가 다음 줄로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 장평을 줄였다. 


신입 인턴의 귀여운 실수였다. 그럴 수 있는 게 요즘 대학생들은 한글과 컴퓨터보다는 워드로 작업을 많이 한다. 대학생 때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 작성하는 글은 단어를 '한 줄'에 넣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글이 흐르는 대로 줄 바뀜을 그대로 둔다. 그러다 처음으로 지시받은 내용은 무엇인지 와닿지 않았을 것이고, 나름 고민하다가 '장평'을 줄이기로 한 것이다.





휴면 명조, 장평 95, 자간-5



자간과 장평 모두를 잘 지켜줘야 하는 경우가 있다. 예전에 전국 각지에 있는 작성자가 쓴 수십 장의 보고서를 본부에 있는 직원이 취합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각 담당자 입장에서는 수십 장이지만, 취합 담당자 입장에서는 수백 장을 만져야 했다. 이때는 공식적으로 지정한 양식을 정말 잘 따라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쌍한 취합 담당자(주로 그 부서의 막내겠지)는 몇 시간 동안 단순 반복 노동 작업을 해야 한다. 


이때 본부에서 내려온 양식에서 폰트는 '휴면 명조, 장평 95, 자간-5'로 지정되어있었다. 사실 모든 작성자들이 내 맘 같을 순 없기에, 가급적 폰트는 기본 설정에서 바꾸지 않는 걸 선호한다. 내 눈에는 휴면 명조, 장평 95, 자간 -5가 가장 예뻐 보인다 할지라도 수십 명이 공동 작업할 때는 이 틀이 깨지기가 정말 쉽다. 가장 단순하게 세팅을 해도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게 공동작업의 묘미 아닌가. 


하지만 어쩌겠나, 저게 양식이라면 나는 수십 장의 문서를 '휴면 명조, 장평 95, 자간-5'로 작성했다. 다소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양식을 잘 만들어서 보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그렇게까지 신경 쓴 건 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나머지는 본부 취합 담당 부서의 몫으로 남겨진 모양이다. 




직장 생활하는 동안 문서작업을 했던 시간을 돌이켜보면 그중에 아주 긴긴 시간을 자간 조정하는데 썼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 혼자만의 문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문서를 취합하는 일을 할 때면 거의 하루 종일 자간을 비롯한 각종 폰트, 장평, 굵기, 크기 등의 양식을 조정하면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날이면 날마다 혁신이 세상을 바꾸는 이 시기에 전국에 수없이 많은 직장인들이 이걸 수정하는데 시간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까웠다.  AI가 있다면 이것도 해줄 수 있을까 상상해봤다. 이런 걸 해주는 기능, 기술도 곧 생길까?


원래 이런 자간 조정은 공무원 조직에서 많이 신경 쓰던 부분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자간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정부기관 문서들도 종종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단어가 다음 문장으로 한 줄 아래에서 이어지더라도 글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는 크게 문제가 없다.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것들은 가급적 한 줄에 넣어주는 게 보기 편하겠지만, 줄글이 계속 이어지는 긴 문장의 경우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문장을 보는 우리의 시선이 조금 편안해지면 괜찮을까? 반드시 지켜야 하는 원칙이 아니고, 융통성 있게 사용하면 되는 방법 정도라고 여겨진다면 '자간 조정'으로 보내는 시간도 좀 줄지 않을까? 어쩌면 이게 문서 양식을 주인 맘에 쏙 들게 바꿔주는 AI의 개발보다 더 빠른 해결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제 직장 경험담에 나오는 모든 동료들을 예쁜 마음으로 바라봐주세요. 다들 저의 소중한 동료이자, 좋은 친구들이랍니다.
이전 05화 결재판 다른 거 써도 되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