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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레 Jul 03. 2022

문서 논쟁 7년차, 이제 그만해요

이게 그렇게까지 중요한가요


개성을 가진 개인이 제각각 문서를 만들어 내면 혼란스러울 수 있다. 기본적인 틀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어야 읽는 이 가 편안하게 글을 볼 수 있다. 문서가 담고 있는 내용, 보는 대상의 특성 등에 따라 어울리는 작성법도 달라질 것이다. 인스타그램, 네이버 블로그, 브런치는 이용자의 성향이나 플랫폼의 특장점들이 저마다 다르다. 그래서 같은 사람이 여러 개의 SNS를 하더라도, 어떤 플랫폼을 활용하느냐에 따라 글을 쓰는 패턴이 달라진다. 


문서규정은 일종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한다. 정부, 공기업 그리고 사기업들은 문서를 작성할 때 일정 틀이 있다. 이 문서 양식은 대학생들이 리포트를 쓸 때와는 다르며, 회사들마다 차이는 있지만 크게 보면 비슷한 구석이 많다. 이 때문에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문서를 봤을 때 구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게 양식이 갖는 의미이다. 




회사 문서는 양식이 매우 중요하다. 



다만, 양식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더 이상 본래의 목적이 무엇인지 잊어버리면 곤란하다. 회사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문서의 양식, 문서 규정의 본질은 결국 내용을 어떻게 하면 읽는 이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내용을 고민하는 시간보다 양식에 집착하는 시간이 길다면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디자인 회사도 아니고, 마케팅 회사도 아닌 우리가 편집에 이렇게 시간을 많이 써도 되나. 고민을 하면 할수록 양식이 더 예뻐지는 건 맞나?



내가 상사에게 바라는 건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을 짚어주는 능력이다. 중학생이라면 할 수 있는 오타 발견 말고, 큰 그림을 그리고 통찰력을 갖고 내용을 분석해줬으면 좋겠다. 왜 이런 건 안 해주는 걸까?



혹시 못하는 건 아닐까?



사실 양식을 지적하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다. 오탈자 발견은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다. 굳이 이쪽 업계에서 20년을 일한 고액 연봉자가 필요 없다. 자간과 장평을 조정하는 일은 그저 하면 그뿐이다. 근데 내용에 대한 통찰력은? 이건 아무나 할 수 없다. 깊은 고민과 제대로 된 경험, 노하우가 축적되어야만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어쩌면 저들은 제대로 된 실력을 키우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직적인 조직 문화가 지금보다 더 강한 시절,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상사의 지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왔기에, 자기만에 비판적 사고로 역량을 키우지 못했기에, 과거의 틀을 잘 답습하는 것을 역량으로 여기며 20년을 살아왔기에, 이렇게 된 걸까? 


이제는 리더의 위치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노하우와 경험 그리고 통찰력 같은 것들로 후배들 앞에서 카리스마를 보여야 하는데. 그러는 법을 모르는 게 아닐까? 어쩌면 양식을 지적하는 것이 일을 잘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나의 의견을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닐까?


6년 문서 논쟁의 시작


신입사원 때부터 지금까지 잊을만하면 논쟁으로 떠오르는 부분이 있다. 바로 '항목의 구분'이다. 


항목 표시 순서 @행정업무편람


위 항목 표시 순서는 일반적으로 문서를 작성하고 항목을 표시해나갈 때 어떤 기호부터 사용하면 좋을지 정리해놓은 것이다. 행정안전부의 행정업무편람에서 가져왔는데, 대부분의 공공기관 및 공기업들 문서 규정이 이를 바탕으로 한다. 


@행정업무편람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위 문서가 너무도 당연해 보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뭐가 논쟁이 될까 싶을 거다. 그렇다면, 다음 두 개의 문서에서 어느 것이 맞는 걸까?


위 문서(1번)는 - 다 음 - 구분 이후에 가. 나. 다.로 전개했고, 아래 문서(2번)는 1. 2. 3.으로 전개했다. 신입사원일 때 나의 사수는 1번이 맞다고 했다. 1. 2. 는 이미 사용했으니까, 다음에는 가나다로 항목을 붙이는 게 맞다는 거다. 


이에 반해 당시 부서장은 2번이 맞다고 했다. 나를 옆에 앉혀두고 행정병 시절 본인의 경험담까지 설명해줬다. - 다 음 - 을 구분으로 해서 새롭게 전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서 번호도 다시 시작하는 게 맞다는 거다. 


이후로도 나는 비슷한 지적을 수차례 받았다. 상사의 취향 혹은 신념이 어디를 향해있느냐에 따라 나는 똑같은 양식으로 문서를 작성해도 어떤 때는 '맞는' 사람, 어떤 때는 '틀린' 사람이 되었다. 


나는 회사 문서 규정과 행안부 행정업무편람을 찾아보았고, 공무원과 군인 친구들에게 어떤 것이 맞냐고 수소문했다. 친구들은 요즘은 기안문에서 - 다  음 -이라는 구분을 거의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듣고 행안부 문서를 보니 2018년도에 나온 최신판에는 이런 문서 형태가 없었다. 



예시 문서) - 다 음 -이라는 구분선이 없다 @행정업무편람


굳이 - 다   음 - 이라는 구분선을 표시할 필요가 없다. 이어지는 내용은 그냥 쓰면 되는 거니까. 생각해보니 그러했다. 지금까지 이 구분은 왜 한 거지? 그리고 애초에 - 다    음 -이라는 구분을 쓸 필요가 없다면, 항목 구분에 대한 논쟁은 왜 해왔던 거지? 


그냥 좀 넘어가면 안 될까?


정답은 없다. 그냥 좀 넘어가면 좋으련만. 나보다 직장생활을 10년, 20년 정도 더 오래 한 선배에게 기대하는 바는 1. 2. 3. 혹은 가. 나. 다. 에 대한 지적이 아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내용보다 양식에 진심인 부장을 보았다. 문서 규정에 이만큼 진심인 나인데, 부장은 과연 공무원, 군인, 회사원 동료들에게 이에 대해 뭐가 맞는지 물어봤을까? 나만큼 문서 규정을 진심으로 들여다봤을까? 


오늘도 나는 갑갑해하며 기안문을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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