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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쓴이 Oct 23. 2022

두터운 솜이불

유년기의 추억


갑작스레 겨울이 찾아온 것 같은 요즘이다.


세탁이 끝난 빨래를 건조기의 규율이 잡힌 열기에 던져넣기보다 베란다에 널어 찬찬히 흔들릴, 한량스러운 여유를 베풀고픈 아량이 생긴다.


밤 사이 쌀쌀한 바람에 빨래가 말랐다. 명태 덕장에 쌓인 눈을 털어내듯 옷에 붙은 먼지를 툭툭 턴다. 즐겨입는 윗옷을 회수하여 입어본다.


본디 체온 유지와 멋을 담당하는 옷의 기능이 순간 반쪽짜리로 전락한다. 모조리 마른 옷 주제에 물에서 막 건진 것처럼 차갑다. 몸이 떨린다. 그러나 씨실과 날실의 연대는 끈끈하다. 그들은 살결에게 대체로 다정하여 곧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


한기와 온기를 동시에 느끼는 찰나, 문득 20여 년 전 겨울이 떠오른다.


할아버지댁에는 두텁고 무거운 솜이불이 있었다. 오묘하게 나프탈렌 향이 나는 것 같던 그 이불을, 나는 무척 좋아했다.


이불 머리는 청록색과 자홍색의 무늬가 동서를 사이좋게 양분하고 있었던 것 같다. 금색의 봉황 자수도 있었던 것 같지만 이것이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다.


설날 온가족이 함께 할아버지댁에서 자는 날이면 이불장 안에서 졸던 이불 무더기들은 일거에 호출되었다.


이불장이 비워지면 나는 이불을 고르게 펼치는 시간도 못 기다리겠다는 듯 이불 안에 다이빙하듯 들어가서 몸을 말았다.


하지만 한파로 추위를 느끼던 나보다 더 떠는듯한 이불의 감촉에 깜짝 놀라곤했다. 이불장의 아늑함에서 꺼내진 것에 골이라도 난 듯 냉랭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러나 잠시 몸을 떨다가 보면 어느새 이불이 따스한 화해의 손길을 내밀며 몸을 노곤하게 덥혀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누군가 내게 행복한 기억을 물으면 내 삶의 여러 좋았던 지점들을 뒤로하고 그 순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왜 그런지 정확한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으나 그때의 나는 분명 압도적인 행복감을 느꼈다.


놀란다. 움츠린다. 천천히 몸이 녹는다. 따스하다. 일련의 감각들이 짧은 시간에 함께 발동하며 나를 약오르게했던 그 때가 왜 이렇게 짙은 기억으로 남았을까.


할아버지댁에는 강풍이 불면 안테나의 흔들림에 따라 화면 송출에 문제가 생기던 낡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있었다. 리모컨도 없어서 드드득 거리며 채널을 돌려야 했던, 정규방송 외에는 방영되지 않던 그 허름한 텔레비전을 나는 참 좋아했다.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일요일 점심 즈음에 씨름이나 ‘전국 노래자랑’을 보셨고 나와 동생들은 ‘날아라 슈퍼보드’ 같은 만화가 보고 싶어서 할아버지께서 잠드시기를 간절히 바랐다. 할아버지의 숨소리가 고르게 바뀌고 들숨과 날숨의 비율이 일치하면 우리는 조용히 도도독 채널을 돌리곤 했다. 그 불편하고 열악한 시청 조건이 마치 게임 속에서 미션을 수행하는듯한 긴장감을 주어서 더 재밌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낡은 텔레비전의 진가는 토요일 밤에 발휘되었다. 가족들과 모여서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방영하던 ‘토요명화’를 자주 보곤했다. 이것을 보기 위해 나는 감기는 눈꺼풀과 힘 겨루기를 하다가 결국 광고도 끝나기도 전에 TKO를 당하곤 했다.


아마 내가 애써서 보고자했던 것은 주로 성룡의 영화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였던 것 같다. 선잠이 든 뒤에 이따금씩 들리던 가족들의 웃음소리와 텔레비전 소리를 좋아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따스한 소음


할머니께서는 이따금씩 마당에서 화덕 위에 솥을 올려 수육을 삶아주셨다. 그리고 명절 즈음에는 숯으로 병어, 조기 등 생선도 구워주셨다. 그것들을 상에 둘러 앉아서 먹다보면 그저 웃음이 났다. 할머니들은 할머니들만의 마법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할아버지댁 이불의 서늘함에서 왜 따스함을 느꼈는지 자문하고 풀어가다보니 답이 보이는 것도 같다.


큰 침대 위에 깐 온수 매트에서 안락하게 잠이들고 커다란 TV로 수백개의 채널을 누비는 나날이지만 갑자기 그때가 그리운 이유는 한량없는 사랑을 받던 나의 어린 날이 벌써 꽤 먼 추억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아쉬움 때문인 것 같다.


내 모자람과 실수들이 죄가 되지 않고 누구를 해하지도 않았던, 잘 먹고 잘 자는 것만으로 복이라 칭찬 받던 날에 대한 막연한 희구 때문인 것 같다.


마른 침을 넘기는데 비강이 과히 따끔거리고 콧날이 시큰한 것은 꼭 건조한 초겨울 바람 때문이 아니라 유년기의 기억을 삼킬 때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려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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