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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온도 Sep 25. 2022

자유의 맛

 



“우리 노동절에 여행 가는 거 어때?”


중국에는 장기휴일이 몇 차례 있다. 그 기간을 흔히 민족 대이동 기간이라고 말할 만큼 전국 각지에서 고향으로, 여행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아주아주 많이 있는데, 5월 1일 노동절(勞動節) 또한 그런 연휴다.


슬기 언니의 제안으로 우리는 여행지를 정했고 ‘상해, 항주, 소주’ 크게 세 지역으로 틀이 잡혀갔다.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가는 장거리 여행이라니,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게다가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다. 큰 탈 없이 잘 지내다 오면 좋겠다는 생각과 한편으론 여자 넷이 떠나는 여행이 조금 걱정도 되었다.


“같은 학교 오빠 두 명이 같이 가면 안 되냐고 물어봤는데, 어때요?”


슬기 언니와 함께 방을 쓰게 된 지윤이. 지윤이는 다른 학교였지만 나와는 동갑내기였고, 금세 친해져 함께 한솥밥을 먹는 사이가 되었었다. 그런 지윤이가 같이 유학 온 오빠들에게 함께 가면 안 되냐는 부탁을 받은 것이었다.

언니도 내심 여자끼리의 여행이 불안했었는지, 별 고민하지 않은 것 같은 승낙을 했고 나와 은정이도 크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대부분 그렇듯이, 타지에 나오면 같은 국적의 사람들에 대한 애틋함이 유독 더해진다. 유학생들끼리는 머나먼 타지에서 서로 부족한 물건들을 공유하고, 모르면 알려주고, 맛있는 음식도 함께했기에, 마치 가족이나 친척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또 비록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워낙 좁디좁은 지역사회에서 규칙을 어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드물기 때문에 더 믿음이 생기기도 했다.


그렇게 여행지와 함께 여행할 인원도 정해졌다. 상해에 가는 기차표와 소주에서 다시 천진으로 돌아오는 침대칸 기차표, 상해에서 볼 서커스 공연 표 등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들을 점검했고, 그렇게 또 한차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일주일간 쓸 인슐린과 혈당체크기,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한 상비약, 옷과 슬리퍼, 화장품, 여권 등등 이 모든 게 나의 보라색 백팩과 작은 크로스백 안에 나름의 규칙대로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5박 6일간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이번 여행에서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난 여행 가이드가 되어있었다. 여행하는 시작부터 끝까지 내 손에는 6일간의 여행 계획이 빼곡히 적혀 있는 종이 한 장과 각출한 예산에 딱 맞게 지출해야 했기에 그때그때 지출을 기록할 지출 기입장이 들려있었다. 요즘 같으면 휴대폰 하나로 그때그때 버스를 검색하고, 맛집을 바로 찾아갔을 텐데, 지독하게 완벽주의, 플랜 걸이었던 그때는 모든 경우의 수에 맞추어 버스와 맛집을 다 적어야 속이 시원했었다. 아마 당뇨가 가져다준 습관이 만든 결실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4월 27일 밤 11시. 상해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노동절 특수에 걸맞게 기차는 발 디딜 틈 없이 바닥과 의자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사람들이 타 있었고, 그나마 앉아서 갈 수 있는 자리를 예약할 수 있었음에 감사해야 했다.

한 번은 새벽에 앉아서 졸다가 눈을 뜨니 내 다리사이, 바닥에 얼굴이 있어 깜짝 놀랐는데, 입석표를 가지고 있어 자리가 없던 아저씨가 피곤에 지쳐 바닥에서 잠든 것이었다. 그리고 이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 상황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기차도 막히는구나.’


13시간 정도 예상했던 기차에서의 여정. 예상대로라면 오후 1시쯤 도착할 거라 생각했지만, 한국의 무궁화호 같은 기차를 탔었던 우리는 오후 4시가 될 때쯤 기차를 벗어날 수 있었다. 무려 17시간 동안 앉아 있었던 대기록을 세운 날이었다.

4월 말의 상해, 역시 습하다. 날씨는 확실히 천진보다도 따뜻, 아니 약간 더웠지만 저녁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드디어 상해에 도착하다니, 2년 전 여행으로 왔던 상해인데, 기분은 정말이지 너무도 다르다.

날씨 때문일까, 사람 때문일까, 아니면 이전의 나와 달라서였을까. 어찌 되었든 기차에서 씻지 못한 찝찝한 느낌과는 다른 기분 좋은 출발이다.

 기차역에서 간단히 끼니를 챙기고, 숙소 찾아 삼만리가 시작되었다. 미리 알아두고 갔지만 지하철과 공원, 처음 가보는 길들을 가려니 뱅글뱅글 도는 기분이다. 그나마 한 시간이 안되어서 숙소에 도착했다. 예쁜 공원 안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6인실. 2층 침대가 빼곡히 있고, 화장실은 공용. 이틀간 묶는 이 숙소는 한국돈으로 단돈 만 이천 원이었다. 하루에 6000원 꼴인 셈이다.

 숙소와 차비는 최대한 저렴하게, 꼭 가봐야 할 유적지나 봐야 할 공연, 맛집은 그래도 챙겨가며 다니는 여행이었다. 일인 최대 30만 원을 넘지 않는 6일간의 여정. 빠듯했지만 알찬 여행이 될 거다.


그렇게 묵은 피로를 씻어낸 숙소에서 나와 상해를 둘러보는 이틀간의 여행. 예원, 와이탄의 야경과 두 번째지만 바뀐 길에 헤매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타이캉루, 훙커우공원에서 이름이 바뀐 루쉰공원, 인생 만두였던 인민광장 역 근처 만두집과 피풍당, 서커스 공연까지. 날씨도 사람들도 여행의 맛집도 모든 게 좋았던 상해에서 이틀을 보내고 항주로 떠난다.


하루 종일 걷는 일정에 힘들고, 오르내리는 혈당에 내 감정도 함께 출렁였기에 아마 다들 내 눈치를 많이 봤을 거다. 서로에게 맞추며 했던 여행, 지금의 나이라면 떠나기 힘든 여행이다.


항주와 소주에 갈 때는 빠른 기차 가오티에(高鐵)로 갔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신도시 상해와는 다른 매력은 항주와 소주. 넓은 차밭과 큰 호수가 있는 항주, 수향 마을이 있는 소주는 역시나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지만 역시나 좋지 않은 기억보다 행복한 기억만 남는 나의 기억이 말해주듯 사진을 보는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는 행복한 여행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은정이가 보내준 유학생 시절 사진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낡은 노트북에 남아있던 그때의 사진과 영상이 없었다면, 행복했던 그때의 나는 저 멀리 기억 저장고에서 평생 나오지 못했을 거다. 여행은 사진으로 남는다는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소주에서 다시 천진으로 돌아오는 날. 3층 침대 기차 칸 중 3층에 걸린 나는 기차 천장과 마주한 잠자리에 들며 아쉬운 마음만 들었었다. 3층에서 잠드는 게 억울해서가 아니었다. 여행이 끝나서 너무나 아쉬운 마음. 서로 일주일 내내 붙어 이야기하고 가족보다도 가깝게 지낸 우리 6명은 어느덧 ‘척하면 척’하는 사이가 되어있었고, 나의 아픔에 힘들 텐데도 앞다투어 챙겨주었던 고마운 진짜 가족이 되어갔다.


유학생활 중 가장 의지 할 수 있고 만남이 즐거운 사람들. 그 여행 이후에 우리의 일상은 매일매일이 여행 같았고, 함께하는 추억 또한 차곡차곡 쌓여 갔다.

 비록 4개월의 짧은 인연이었지만 그 이후, 한국에서도 정을 이어 나갈 만큼 우린 이미 멀리 있어도 가까운 사이가 되어있었다.


유학을 다녀온 지 꼭 10년이 된 지금, 다 큰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 나는 왜 이렇게 아이 같았을까, 두 오빠들도, 슬기 언니도 참 어렸던 나이였다.


당뇨 진단을 받고 1년이 지났던 그때. 그렇게 학교에서, 또 유학생활 속 작은 사회에서 나는 아주 잘 적응해갔다. 오히려 수줍고 자신감 없던 20살 이전 나의 모습과 비교하자면 정말 다른 모습니다.


내 생각을 당차게 말할 줄 알게 되었고, 내 선택이 설령 후회되는 선택이 될지라도, 온전히 나를 믿고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전과는 다른 나의 모습에 새로 만난 사람들은 느끼지 못했겠지만 나의 가족들은 적응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갑자기 화를 내버리는 나의 모습. 아니 쏘아붙이는 듯한 모습에 적지 않게 당황한 가족들.


“요즘 들어 화가 늘었어.”


당뇨 진단 초기 엄마는 종종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 또한 알고 있었다. 물론 할 말을 그때그때 하지 못해 화병이 나서 당뇨가 온 건 아니었지만, 어쩌면 내가 나의 의지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너무 참기만 해서 이렇게 아픔이 온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더 이상 어떤 일에도 참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스스로 스트레스를 자초하는 일은 없도록 하는 것. 그게 내가 나를 위하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20대의 어린 나는 그렇게 어쩌면 조금 예민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를 위해 챙겨야 할 게 많았던 나의 모습. 그리고 내 주위 사람들을 위해서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일들.


‘매일 아침 화장을 하는 것, 아침에 무가당 수프와 바나나를 챙겨 먹는 것, 하루 한 끼 정도는 4인분의 한국음식을 만드는 것, 매일 밤 1시간 이상의 운동을 하는 것.’


중국에서의 일상은 매일이 나를 위한 유의미한 반복이었고, 그 일은 전혀 지루하지 않은 반복이었다.

비록, 신경이 더 예민했고, 나를 돌보느라 한국에 있는 남자 친구, 가족들 생각은 덜 했었지만, 온전한 나만의 생활을 하던 그때의 일상은 평생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한 해가 되었다.



 2012년,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나의 첫 독립의 해를 지나, 나는 부쩍 자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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