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형 당뇨 판정을 받은 그 해 겨울, 나의 생활패턴이 너무나도 ‘바른생활 어른이’였던 겨울방학이 그렇게 지났다.
남들은 스펙 쌓기에 정신없이 바빴을 그때, 난 건강만 챙긴 채 3학년이 되어야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수강신청을 했고, 전처럼 무리한 수업 스케줄이 아니어서 이번 학기는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3학년 1학기, 이번 학기도 예외 없이 교직 수업을 신청했다. 그나마 계속되는 전공 수업에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건 교직 수업뿐이었다. 교직이수는 이 학교를 선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등록금이 비싸고 가까웠던 학교는 교직이수의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비싸다는 것 다음의 결정적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육방법 및 교육공학, 교육과정 및 교육평가.. 음..’
듣기엔 따분해 보일 수 있는 강의명이지만, 천사 같은 교수님과의 수업이라 즐거운 수업일 거란 생각을 했다. 지난 학기와 같은 교수님이기에 확신할 수 있다.
수강신청 다음으로 걱정한 일은 장거리 통학에서 가장 걱정이었던 건 버스에서 행여나 저혈당이 되면 어떻게 할지, 그리고 친구들에게 인슐린을 맞는 모습을 보였을 때 그 시선들이었다.
저혈당은 사탕을 한 움큼 가방에 넣어 다니면 안심이라지만, 학교 음식을 먹으며 중간중간 혈당을 체크하고 주사를 맞는 일이 되려나, 나 또한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학생이라면 누구나 정신없다는 3월, 한 달이 지났다.
왜 걱정을 했을까 싶게 저혈당은 그렇게 자주 오는 녀석이 아니었고, 친구들은 오히려 주사 맞는 일이 힘들겠다며 위로와 걱정을 해주었다.
한동안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녀야 하나 걱정했지만, 학교 식당의 일반식을 먹으며 차차 적응해나갔고, 장거리 통학에 더 이상 짐을 늘리고 싶지 않아서 혈당체크는 아침 공복과 취침 전 혈당 체크 두 번을 주기로 하기 시작했다.
물론 혈당을 중간중간 체크할 수 없어 분명 고혈당일 때가 많았겠지만, 그래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고, 어느새 당뇨와 많이 친해진 나의 학교생활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 나란 동물도 생각보다 적응력이 좋구나.‘
그러던 중 뜻밖의 인연이 찾아왔다.
“저기 수경아, 혹시 남자 친구 있어?”
“응? 아니 없어.”
교직 수업을 같이 듣던 다른 과의 한 여자애가 나에게 묻더니, 별안간 옆에 앉아있는 한 남학생에게 이사실을 전했다.
“남자 친구 없대요.”
‘이건 무슨 상황이지.’
아무래도 여자애를 통해 물어봐 달라고 말한듯하다.
교직 수업은 각 과마다 이수할 수 있는 학생들이 정해져 있기에 2-3학년에 걸쳐 함께 듣는데, 일반 전공과목보다 소수인원이라 서로 잘 알고 있다. 3학년 초 수업에서 그 공대생 친구를 봤는데, 난 그 남자와 서로 사귀는 사이인 줄 알았다. 나중에 여자아이와는 꽤 말을 텄었는데, 그 남학생은 그 여자애의 남자 친구라고만 생각했지, 별로 주의 깊게 보지 않았었다. 아무래도 나보다 선배인 것 같은데.. 왜 굳이 물어보라고 시켰을까, 자기가 물어보면 될걸..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공대생 남학생은 나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았고, 알고 보니 그 여자애와는 선후배 사이일 뿐이며, 사실 3월부터 나에게 관심이 있었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다.’
보통 내가 먼저 좋아해서 사귀게 되는 경우가 더 좋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이건 조금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 사람의 표정에서 떨림과 진심이 느껴졌고, 나의 감정 또한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이 있었다.
그렇게 시시콜콜 문자를 주고받고, 별 내용 없는 전화통화를 하며 썸을 타기 시작했고, 그의 사소한 챙김에 나의 마음에도 봄바람이 불어왔다. 어느덧 가장 사랑하고 싶은 날씨의 5월이 되었다.
“저기.. 시간 괜찮으면 같이 꽃 보러 갈래요?”
쪽지를 전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떨었을까를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도서관 앞자리에 앉더니, 수줍게 건네던 쪽지.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함께 꽃구경을 하러 자리를 정리했다.
‘이 날씨에 도서관에 앉아있는 건 사치지.’
춥지도 덥지도 않은 어느 5월의 오후. 차창 밖으로 구름이 정말 뭉게뭉게 피어있다. 사랑하기 정말 좋은 날이다. 함께 꽃을 보고, 산책도 하며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예쁜 것만 보고 예쁜 말만 나눈 오랜만의 따사로움이었다.
식사를 하러 가는 길, 꼬불꼬불 산길을 한참 달렸다. 대체 이 남자는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꽤 근사해 보이는 레스토랑이었다. 아직은 어린 나이 21살, 이런 곳에 남자와 단 둘이 오는 건 어쩌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맛있는 음식과 말랑말랑한 분위기 속에 식사가 끝날 무렵 남자가 운을 띄웠다.
“저.. 그.. 우리 한번 만나보는 거 어때?”
“지금도 만나고 있잖아요?”
식은땀이 줄줄 나는 모습이 귀여웠고, 긴장을 녹여주려 농담을 했다. 그리고 언제부터 그랬는지, 또 왜 좋아했냐는 둥 쓸데없는 질문들을 늘어놓았다.
“사실, 3월에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 수업 끝나면 조금 더 보고 싶어서, 먼저 후다닥 차를 타고 내려가서 학교버스 타고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갈 정도로.”
나를 계속 지켜봤다는 그 사람의 말에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이렇게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라니 감사했고, 그의 순수함이 전해졌다. 그리고 이내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초조한 모습에 다시 한번 웃음이 났다.
“어.. 사실 솔직하게 말할 게 있어요. 아니, 조건이 필요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무슨 계약을 맺는 것도 아닌데 조건이 필요하다니, 참 맹랑한 스물한 살의 패기다. 그래도 숨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사실 전 오빠가 생각하는 만큼 좋은 사람은 아닐 거예요. 그래서 실망할 수도 있어요. 먼저 전 몸이 좋지 않아요. 1형 당뇨라고, 췌장에서 인슐린 분비를 못하는 병이에요, 그래서 식전에 인슐린을 매번 맞아야 하고, 정기적으로 병원 가서 검사도 받아야 해요. 그리고 전 같은 이유로 상처받고 싶지 않아요. 헤어짐도 그렇고, 혹시나 내년엔 제가 유학을 갈 수도 있어서.. 그럼 장거리 연애가 될 수도 있고, 저도 경험했었지만 힘든 연애가 될 거예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외워둔 대사처럼 1형 당뇨에 대해 말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첫사랑과 그 이후 만났던 사람을 군대와, 유학 등 장거리 연애의 이유로 헤어졌던 경험은 나에게 트라우마처럼 자리해 있었고, 나에게 있어 장거리 연애는 하면 안 되는 연애로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조건을 내걸 듯 괜찮겠냐고 물어보는 나의 물음에 그는 사랑에 빠진 남자가 얼마나 직진본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답을 해주었다.
“싫다는 게 아니라 다행이다.”
우리는 당장의 행복과 당장의 감정에 취해 멀리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한다.
얼마나 우울하고, 힘들지, 또 잊기 위해 괴로울지. 아니 그 미래의 모습 때문에 무엇인가 못한다면 그 또한 좋은 선택이 되지 않으려나.
나도 마찬가지였다. 현재의 사랑과 행복에 충만한 마음이 분명 영원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똑같은 선택을 반복하고야 말았다. 고작 스물 하나 아닌가. 많이 사랑하고 많이 상처받고, 관계 속에서 나를 잘 치료하는 방법을 배울 가장 좋은 나이.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나는 5년 동안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진정으로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병이나 아픔 따위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내가 그 사람의 아픔과 단점을 함께 할 자신이 있는지, 그리고 그 아픔이 가져 올 또 다른 나비효과에도, 그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에서 버틸 마음이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마음 다해 고마움을 보낸다.
내가 아픔으로 가장 나약했을 시기에 나타나
나의 자존감을 지켜주었던 사랑이라,
그 사랑을 당연하게 받아도
그저 흐뭇하게 바라봐주던 사람이라,
오래오래 고마웠다고 꼭 말해주고 싶었다.
그때의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