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나는 난생처음 엄마 가게가 아닌 다른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4학년을 교환학생으로 중국에서 보내느라, 교직이수의 마지막 단계였던 교생실습을 하지 못했기에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했고, 그 덕분에 코스모스 졸업을 해야 했던 나.
한창 취업준비를 해야 할 시기였지만 그렇게 졸업이 미뤄지며 심리적인 압박감은 조금 줄었다.
그래도 내 생활비는 벌고자 하는 마음에 일주일 한두 번 학교 가는 날을 제외하고 평일에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었는데, 마침 집 근처에 있는 아이스크림가게의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다.
그렇게 알바 채용사이트를 통해 지원을 하고 처음으로 면접을 보러 가던 날.
‘아니, 지금도 이렇게 떨리는데 나중에 취업 면접은 어떻게 보지, 후….’
알바 면접을 처음 보는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환한 가게 안에 입성했다.
차가운 도시 여자 같은 느낌, 갈색머리의 짧은 쇼트커트, 한눈에 봐도 사장님이다. 내 생각과는 달리 사장님은 젊은 여자분이셨다.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알바 경험은 있는지, 얼마나 오래 일을 할 수 있는지 등등 기본적인 질문들이 이어졌고, 짧은 면접이 끝났다. 그리고 다음날 합격통보를 받았다.
당뇨 진단을 받고 2년 차, 나는 그렇게 세상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간 기분이 들어 왠지 모르게 설레었고, 한편으론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걱정도 들었지만 잘 해내고 싶었다.
“아이스크림은 맛보기로 언제든 먹어도 괜찮아.”
‘적어도 당 떨어질 일은 없겠다.’
물론 적당히 먹어야 했지만, 나에겐 최고의 베네핏이었다.
일주일 동안 온라인 교육을 들으며, 알바 선배인 진선이의 가르침으로 짧은 인턴을 마치고, 그렇게 일주일에 3-4일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나는 우리 동네 큰 사거리 가장 예쁘게 자리한 아이스크림 매장에서 혼자 가게를 보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스크림가게 아르바이트는 여자들 기피 알바 1순위 중 하나였지만, 그래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나에게 제격인 일이었다.
아침 9시 40분, 가게에 출근하면 먼저 오픈 준비를 하시던 사장님과 바통을 터치한다.
손을 깨끗이 씻고, 앞치마와 모자를 쓴 뒤, 먼저 청소를 시작한다. 대걸레로 바닥을 닦고, 가게 한쪽 벽면 가득한 유리창을 과 아이스크림 앞쪽 유리, 테이블 기둥 등 마른 수건으로 닦아낸다.
아이스크림을 퍼낼 때 쓰는 스쿱은 총 10개, 두 시간에 한 번씩 끓는 물로 열소독과 알코올 소독을 한다. 혼자 청소하는 시간이 대략 1시간 정도. 물론, 오전에 오는 손님은 그때그때 상대해야 한다.
‘이렇게 철저히 청소한다면 정말 믿고 먹을 만하다.’
알바 이후에도 난 친구들에게 여긴 정말 위생적이라며 추천하곤 했다. 그만큼 청결함이 생명인 곳이었다.
점심시간은 따로 없다. 내가 정한 시간은 11시 45분쯤. 점심값을 주셨지만 집에서 도시락을 싸와 먹었다. 현미밥과 채소볶음 등 혈당에 큰 지장 없는 음식들을 먹고 이내 바로 움직이며 일했다.
가끔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먹는 일은 참 달콤했는데, 워낙 소량이어서 혈당 변동에 큰 지장을 주진 않았다. 오히려 혼자 손님을 5-60명 받다 보면 어느새 당이 떨어지곤 해서 주사를 적게 맞기 일수였다.
‘안녕하세요 000000입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친절한 인사는 어느덧 하루 중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되어버렸고, 행복해하는 손님들의 모습에 덩달아 행복해지는 나를 보며, 스스로도 ‘정말 서비스직이 적성에 맞는구나’ 생각했다.
혼자서 일하다 보면 가끔 손님이 뜸한 시간을 틈타 영단어를 외우곤 했다. 그래도 심심하긴 마찬가지였는데, 그럴 때마다 ‘혼자 하는 일은 나에게 맞지 않아.’ 하는 생각이 들었고, 역시 북적이며 함께 일하는 게 좋다고 생각이 들 때쯤, 금요일이 돌아왔다.
평일 중 유일하게 혼자가 아닌 둘이 가게를 보는 날. 금요일이다.
금요 메이트 재영이는 나보다 어린 여동생, 같은 학교 다른 과 후배였다. 바빠도 서로 즐겁게 웃으며 일을 했고, 또 가끔 이런저런 고민이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었다.
“언니는 뭐 할 거예요?”
“나? 승무원 준비해보려고 해”
“와. 잘 어울려요 언니, 멋지다.”
여자들이라면 한 번쯤 갖는다는 승무원. 예쁘게만 보이는 것과는 달리 장시간 비행에 고객들 상대에 또 밤낮이 바뀌는 스케줄 근무에 고된 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어릴 때부터 엄마 가게에서 오랜 기간 손님들 대하는 일에 익숙했고, 아이스크림 가게 알바를 하면서도 서비스직이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 때쯤, 그 일은 어느덧 도전해 보고 싶은 꿈이 되어있었다.
누군가에게 기억에 남을 서비스를 해주고, 함께 기쁠 수 있다는 만족감. 스물셋이 되었을 무렵, 나는 내 직업성향에 대해 갈피를 잡았다.
그리고 아르바이트가 익숙해질 때쯤, 교생실습과 아르바이트의 일정 조율이 어려워 3개월 동안 정든 가게를 아쉽게도 떠나야 했다.
제법 봄 날씨에도 익숙해진 4월, 나의 모교에서의 교생실습. 어릴 때부터 늘 선생님이란 꿈을 가슴에 품었던 내가, 승무원의 꿈을 안고 실습을 다니다니. 그래도 열심히 생활한 걸 보면 그 꿈도 놓치고 싶지는 않았나 보다.
“진 선생님은 임용 준비하고 있어요?”
“아, 전 승무원 준비 중이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랑 수업하다 보니 어릴 때부터 꿈꾸던 교사도 점점 하고 싶어 지네요.”
그랬다. 둘 다 하고 싶지만 하나를 골라야 하는 욕심쟁이. 물론 내가 하고 싶다고 쉽게 가질 수 있는 직업들은 아니지만.
교생실습이 끝날 때쯤엔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보람과 열망이 조금 커졌었는데, 이내 승무원 준비에 열중하느라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서류면접 합격’
어느덧 졸업일자가 다가오고 있었던 7월, 밤새워 쓴 승무원 공채 모집 이력서는 합격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8월 중순, 서울로 면접을 보러 가야 한다.
지금 이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또 한 번 바보 같은 짓을 해버렸다.
‘면접에 가면 팔이 걸어 다닌대.’
키 크고 마른 사람들은 다모인다는 승무원 면접, 당뇨 전과 비교하면 오히려 마른 몸에 운동을 해서 근육까지 붙어 체력은 좋아졌지만 키가 월등히 큰 것도, 비율이 좋지도 않았다. 외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 했던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한 달 동안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오전 7시 수영반에 등록해서 11시까지 공복에 수영을 했고, 점심은 단호박과 샐러드, 오후 1시부터는 토익공부를, 저녁 6시부터 12시까지는 엄마 가게에서 일을 도왔다.
저녁은 두부 샐러드. 극단적으로 탄수화물을 배제시킨 다이어트는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게다가 공복으로 수영까지 3시간을 한 터라, 한 달이 지나자 몸무게는 5킬로 가까이 빠져있었다.
이때엔 먹는 양도 줄고 채소류만 먹다 보니 인슐린 요구량이 적어져 주사도 건너뛰기 일 수였다.
‘독하다 독해.’
쌀 한 톨 먹지 않고 다이어트를 하는 딸의 의지에 엄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8월, 면접날이다. 김포에 있는 면접장소에 가려면 새벽부터 출발 준비를 해야 한다.
언니가 사준 흰 블라우스와 검은색 치마, 검은색 하이힐 그리고 쪽진 머리, 누가 봐도 ‘저 면접 보러 갑니다.’ 복장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면접장 근처 지하철역 화장실, 걸어 다니는 팔들이 몇 명 보이기 시작했다.
‘와 진짜 예쁘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세상엔 예쁘고 키 크고 마른 사람들이 많았다. 아니, 여기 다 모인 건가.
한참을 기다려 겨우 면접장 앞에 대기하는 순서가 왔다.
“그 벨트는 하고 들어갈 거예요? 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 치마에 있는 얇은 벨트가 눈에 띄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다들 하나같이 같은 곳에서 맞춘 의상 인양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다. 그들 틈에서 나의 모습은 마치 미운 오리 새끼 같았다.
준비한 말은 한마디도 못 한 떨리는 면접이 끝나고, 집에 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승무원 면접 준비는 대부분 학원에서 이루어지며, 스물셋의 내 나이도 적은 나이가 아니라는 걸, 화장과 옷차림은 대부분 기술자의 손을 빌려 완성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조금 허무했지만 아직 합격여부를 모르기에 끝없는 다이어트는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왜 이렇게 숨이 차지.’
계단 세 칸을 올라가는데 가쁜 숨이 차올랐다. 수영장에서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고, 물속에서 숨을 참는 일도 버거워졌다. 내 얼굴은 어느 순간 노랗게 질려있었다.
때마침 당뇨 외래 진료일이 되었고, 난 그제야 숨이 가빴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빈혈 수치가 너무 낮네요.”
안 먹어도 너무 안 먹었던 탓일까. 누가 봐도 황달기가 있는 누런 얼굴로 나는 빈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수혈을 권했지만 장기간 철분제를 복용하는 것으로 외래를 마쳤고, 승무원이라는 꿈도 그때 마침표를 찍었다.
“교대근무에 매일 서있고, 어차피 해도 오래 못 버텼을 거야.”
엄마의 위로는 나를 더 무너지게 했다.
나도 알고 있다. 생활패턴이나 스트레스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제 때 먹고 운동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걸. 하지만 내 아픔을 핑계 삼아 꿈 한번 못 꿔 보고 그런 결정을 내리고 싶지는 않았다.
도전해보고 싶었고, 내 길이 아니라고 해도 한 번쯤은 꿈꿔 보고 싶었다.
그런데 꼭 이런 중요한 타이밍에 이렇게 몸이 아픈 내가 원망스러웠다. 뭔가 열심히 해보고 싶어 도전하면 건강의 이유로 포기하게 되는 현실이 서글펐고, 그럴 때마다 나 스스로를 원망했다.
사회에 이제 막 발을 디디는 스물셋, 나의 한계를 인지하고, 그에 맞는 적정선의 노력을 한다는 건 아직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나에겐 적당한 노력이 필요했는데, 적당할 수 없었다. 내 한계를 넘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낙담을 한들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이 순간에도 내 정신건강을 해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억지로라도 좋은 생각만 하기로 했다. 모든 걸 보내듯 울어버린 하루만 빼고. 나는 더 바쁘게 움직였다.
‘훌훌 털어버리자. 나의 길이 아닌 거야, 더 좋은 기회가 올 거야.’
좋게 마음먹어서였을까. 기회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