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의 문에서 낙담한 채 방황하고 있었던 2013년 8월의 어느 날. 뜻밖에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출산휴가를 대체할 3개월 단기 기간제 교사를 구하는 전화였다.
“아, 네. 12월 말까지 만 이라고요? 네네, 중학교에서 한자랑 중국어 과목이고요….”
코스모스 졸업을 한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았던 여름의 끝자락. 9월 추석이 지나고 투입이 되는 꼬꼬마 선생님으로 그렇게 사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진로에 대해 방황하고 있을 때쯤, 어쩌면 하늘이 주신 기회이지 않을까 하는 맘에 덜컥 응해버렸다.
‘내가 선생님이라니….’
초등학교 시절 수줍은 나에게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로망이었다. 늘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자 존경의 대상. 선생님이 하는 말이라면 불구덩이에도 뛰어들었을 거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지금의 교육현장 분위기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내가 체감하던 교권은 실로 대단했다.
‘그래. 이번에 100일 동안 잘 체험해보고 임용고시를 준비할지, 다른 일을 할지 정하자.’
마치 나의 운명이 내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현실을 도피하듯, 경험을 핑계로 난 처음 중학교 2학년 남자아이들의 담임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서류면접과 대면 면접을 거쳐 선생님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23살의 나에게 주어진 일은 2학년 5반의 담임교사. 그리고 2학년 한자수업, 3학년은 중국어 수업, 거기에 일주일에 한 번은 오전 시간을 괴산에 있는 고등학교로 중국어 순회수업을 나가는 것이었다.
‘그래, 젊어서 하는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잘할 수 있을 거야. ’
패기가 넘치는 도전이었다.
난 2층에 있는 2학년 교무실을 쓰게 되었다. 7명 정도가 쓰는 작은 교무실. 내 자리는 출입구 바로 옆자리, 오른쪽 자리에는 수학 교과와 학생부 지도를 담당하는 30대 남자 선생님이 계셨고, 그 옆으로는 체육교과를 맡고 있는 학생부장 선생님께서 자리하고 계셨다. 교무실 가운데에는 협탁과 소파가 있었고, 나 자리에서 맞으편으로는 2학년을 맡고 계시는 기술과, 가정과, 사회과, 국어과 선생님들의 자리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들에게는 내가 얼마나 아기 같았을까.
갓 대학을 졸업하고 잔뜩 긴장해서 웃음마저 어색했을 시절. 나름대로 최대한 경험 없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애써 쿨한 척 웃어넘기는 일이 많았고, 손에 땀이 잔뜩 나지만 아이들 앞에서도 태연한 척, 아무것도 아닌 척. 오만방자했던 꼬마 선생님이었다.
그렇게 꼬마 선생님은 출근하자마자 중간고사 문제 출제로 더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2주 뒤까지 중간고사 문제를 출제해야 한다고…?’
10월 초에 있는 중간고사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험문제는 4월에 교생실습을 하며 담당 선생님이 출제하신걸 재검토했던 게 다였는데,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시험까지, 중2 한자, 중3 중국어, 고3 중국어까지 3개의 시험문제를 준비해야 한다.
당황하긴 했지만 애써 당황하지 않은 척, 그렇게 고고한 백조가 물아래에서는 발버둥 치는 것처럼 퇴근 후에도 집에서 연장근무가 계속되었다. 아마도 3개월 동안 많은 일을 경험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일이 많은 건 문제가 아니었다. 새로운 문제들은 언제나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으니.
“선생님 지금 애들끼리 싸워요!! “
중학교 2학년 남자반 담임이 그렇게 호락호락 할리 없었다. 거기에 2학년에서 말썽 꾀나 부리기로 소문난 아이들은 우리 반에 전부 다 모여있었다.
첫 만남 이후 2주, 서로의 탐색전을 고요하게 보낸 이후부터, 이젠 하루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처음엔 그냥 사소한 다툼으로만 알았던 아이들의 모습은, 시간이 지나며 어떤 아이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커다란 날개를 달아주었고, 어떤 아이에게는 씻을 수 없는 굴욕감을 지니게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지독한 사춘기를 보내는 중학교 2학년 남자아이들의 심리를 이해해보려 갖은 노력을 했던 꼬꼬마 교사의 모습은, 구멍 난 독을 채우는 콩쥐의 모습과 흡사 비슷했다.
나의 독에 임시방편으로 구멍을 매워줄 두꺼비 같은 존재들이 곁에 없었다면, 난 아마 그곳을 뛰쳐나왔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소동이 일어나면 늘 우리 반이었고, 나는 언제나 그랬듯 연신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를 말하고 있었다.
‘쉽게 온 기회에는 역시나 쉽지 않은 복병이 있다. 노력 없이 거저 오는 건 없어.’
어릴 때부터 노력하지 않으면 뭐하나 쉽게 되는 게 없었던 나는, 요행을 바라지 않았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예외 없이 이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설렘으로 가득했던 출근길. 학생들로 꽉 찬 만원 버스를 40분 내내 서서 가도 마냥 행복했던 날들이 지옥행 급행버스로 변해가고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떤 사고들이 나를 고개 숙이게 만들지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그나마 똘똘한 눈으로 나를 봐주는 아이들의 눈빛에 치유받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수요일. 해방의 날이다.
괴산에서도 한참 들어가야 나오는 작은 고등학교. 아침 일찍 괴산에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1시간, 괴산에서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50분 정도 한참 들어가면 학교가 보인다. 우리 집에서 괴산에 있는 학교까지 버스로는 거의 2시간이 걸리는 여정임에도, 고등학교 수업은 마치 말 못 하는 아기만 보다 말이 통하는 어른과 말하는 기분을 느끼는 자유부인이 된 아기 엄마의 하루와 같은 소중한 힐링타임이었다.
스물셋의 선생님과 열아홉의 제자들. 고작 4살 차이, 언니, 누나 같은 모습의 나는 그들에게 선생님보단 고민상담을 해주는 선배 같은 느낌이었을 것 같다.
그래도 수능을 앞둔 고3. 제2외국어에, 연달아하는 두 시간 수업이 지루할 수도 있었겠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수업을 듣던, 진심으로 예뻤던 아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오후에는 담임반 종례를 해야 하기에 다시 또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가 학교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래도 해방의 날 수요일은 여정의 피곤함보다는 달콤한 정신 충전의 하루였다.
2학기, 두 번의 시험과 가을 체육대회와 축제. 100일간의 짧은 순간은 제법 많은 추억들로 채워졌고, 12월 27일, 나는 방학을 얼마 남기지 않은 날 마지막 출근을 했다.
교사의 일에 제법 익숙해졌던 시간, 그리고 고된 일상이지만 도전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을 때였다.
분명 교사라는 직업은 어떤 이에게는 워라밸을 지킬 수 있는 최적의 직업이라 생각될 수 있다.
점심시간도 근무시간으로 인정해주기에 4시 30분이면 퇴근이 가능하고, 일반 직장이라면 꿈꾸지 못할 한 달간의 방학, 자기 계발시간이 매년 두 번이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 때문에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힘들었지만 그만큼 보람이 있는 일이었고, 누군가의 인생에서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새로운 배움을 맛 보여줄 수 있는 직업이기에. 긍정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좋은 교사가 되고 싶었다.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었을까.
짧은 근무를 끝으로 꿈을 향해 달려가는 원동력을 찾을 수 있었고, 미래의 막연함에서도 조금은 벗어난 기분이었다.
뭐든 쉽게 이루는 법이 없는 나. 이번에도 어렵겠지만 전보단 과정을 즐길 줄 알게 된 꼬마 어른이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