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3개월의 학교 근무를 끝으로 어느덧 나는 스물네 살이 되어있었다.
본격적으로 임용고시를 준비하기에 앞서 이번 겨울에는 한국사 검정능력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시험일정을 보니 보름 정도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다.
‘고3, 수능을 볼 때도 선택하지 않았던 한국사를 이렇게 다시 하게 될 줄이야….’
한국인이라면 알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긴 했지만, 구석기시대부터 근현대사까지 내겐 그냥 전부 다 외울 것 투성이로 보였던 한국사였다.
작년쯤부터 교사 임용고시를 응시하기 위해서는 한국사 능력 3급 이상의 자격증이 필요했고, 그 덕분에 우리 역사를 다시 공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려웠던 기억의 한국사는 너무나 재미있었고, 학습에 급속도로 빠져들게 하는 마법 같은 과목이 되었다. 자격증을 위해 시작한 과목이었지만, 한눈에 들어오는 연대 별 흐름과 사건 전개가 더 이상 외울 것이 아닌 하나의 대 서사시, 스토리처럼 받아들여졌다.
시험을 위한 공부였지만 2주 동안 한국사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공부가 아닌 우리나라를 더 깊게 알게 되고 새삼 독립투사들에 대한 감사함을 절로 느끼게 된 나날이었다.
시험이 무사히 끝나고 난 일을 하며 시험을 준비하고 싶었다.
제2외국어인 중국어는 그 수요가 일반과목들에 비해서 적기 때문에 다른 과목들보다 강의비가 배로 들었다. 아마 일 년을 꼬박 공부한다고 하면 생활비까지 못해도 천만 원 정도는 쓸 것 같았는데, 그 돈을 언니나 엄마에게 기대고 싶지 않았다. 집안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다.
‘기간제 자리 나, 학원일이 있으면 좋겠는데….’
대부분의 기간제 자리는 기존에 있던 사람들을 연장 채용하는 일이 많았고, 그 수가 적을 수밖에 없는 중국어는 더욱이 그랬다. 초짜였던 나는 그 사실조차 나중에야 알았지만.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고 모두 탈락. 그러던 중에 운 좋게 2주 동안 단기로 단양에서 근무할 수 있었고, 관사에서는 짧은 생활을 마치고 다시 청주로 돌아오기도 했다.
어느덧 2월의 끝자락.
‘그냥 올해 공부만 하라는 뜻일까.’
반 포기 상태였던 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중학교 기간제를 구한다는 연락이었다.
역시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복이 온 것일까. 비록 개학이 3일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당일 오후, 바로 시험과 면접을 본 뒤 당당히 그곳에서 1년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공부도 할 수 있고, 미리 학교 경험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3월 3일 새 학기의 첫 시작. 나는 3학년 7개 학급의 중국어를 맡았고, 2학년 3개 학급의 진로수업,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은 외부 다른 학교로 순회수업을 나가게 되었다. 거기에 덧붙여 내게 주어진 별도의 업무는 방과 후 부. 흔히들 교사들은 수업만 준비한다고 생각하지만 환경부, 학생부, 평가계 등 여러 부서들로 나누어 업무를 보고 있다. 3할이 수업이 이라면 7할이 기타 업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담임을 맡는다면 수업을 하고 오면 처리해야 할 메시지가 20개나 쌓여 있을 때도 있다.
이번 학교에서는 지난번 학교보다 규모가 컸다. 교사들이 60여 명쯤 되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순회를 나가는 나는 담임에서는 제외되어있었고, 대신 3학년 여자반 부담임을 맡게 되었다.
중국어 수업에 대한 오리엔테이션과 수행평가는 어떤 방식으로 치러지는지 등. 첫 수업은 생각보다 차분하고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래도 한번 경험을 해봐서 그런지 긴장이 덜 되었다.
수업이 없는 시간은 방과 후 일을 준비하고 정신없이 보냈는데, 바로 내 파티션 앞에 앉으신 부장님이 작년에도 하셨던 업무라 많이 알려주셔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게다가 방과 후 부원은 나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는데, 동갑내기인 이번에 첫 발령을 받은 역사 선생님이었다.
역시 고난이 지나면 희망이 보인다더니, 작년에 첫 학교에서 마음고생을 하고 올해는 수월하게 보낼 수 있겠다 싶었는데.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다시, 그 학교로 순회를...?’
수요일. 안 그래도 순회 가는 학교가 궁금했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다시 눈을 비비고 있었다.
맞다. 그 학교다. 작년, 3개월 간 나에게 혹독한 가르침을 준 바로 그곳이었다.
남자아이들을 상대하는 게 너무 힘들었던 기억에 티 내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상처와 충격을 많이 받았던 난,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있었다.
‘2학년이었던 그 아이들이 이제 3학년이 되었으니 이제 한자수업이 아닌 중국어로 다시 만나겠구나.’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내가 맡은 일이었고, 그래도 한 해가 지나 조금은 달라져있을 아이들의 모습을 기대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힘차게 인사를 하고 들어간 교무실엔 역시나 깜짝 놀란 선생님들의 표정이 보였다.
다른 학교로 가신분들도 계셨지만 대부분 그대로였다. 순회교사 자리는 후관 1층, 함께 교무실을 썼던 선생님들도 보였다. 3개월이었지만 정들어 버려 헤어짐이 아쉬웠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역시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
과도한 걱정 덕분일까. 아니면 고작 3개월 사이에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내 걱정과는 달리 고입을 앞두고 있는 아이들은 생각보다 차분히 잘 따라주었고, 다시 온 고향 같은 이곳은, 작년 괴산을 오가던 그날처럼 힐링데이가 되어갔다.
“진 선생, 우리가 이번 겨울방학에 일본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괜찮으면 같이 가는 거 어때?”
“일본 여행이요?”
더디 갈 것만 같던 한 해가 다 지나갈 무렵, 기술과 부장 선생님께서 의외의 제안을 해주셨다.
여행이라니, 여행은 자고로 마음과 뜻이 맞는 사람이어야 권하는 게 아닌가, 한편으론 나를 편하게 그리고 좋은 사람으로 봐주신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나의 꾸미지 않은 모습을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야 한다는 것, 20대부터 50대까지의 다양한 연령의 여섯 사람이 의견을 맞추어 며칠을 함께 지낸다는 것에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고민의 시간도 잠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20대 선생님, 아이를 키우시는 30대 여자 선생님 두 분, 40대 여자 선생님과 50대 남자 부장 선생님 그리고 나까지 여섯 사람의 여행 계모임이 단숨에 꾸려졌다.
중국 교환학생 이후로 2년 만의 해외여행이다. 어느새 불편함보다는 여행에 대한 설렘이 내 머릿속을 둥둥 떠 다니고 있었다.
세대를 아우르는 단체 자유여행. 3박 4일 일정. 예산은 인당 30만 원 정도.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일본은 일본어를 할 줄 알아야 여행이 편하다는 말을 들었었다. 지하철도 복잡하고, 영어로 소통하기도 어려워서 우리 여행계의 다섯 사람은 일본어 가능자인 Y 선생님을 의지해야 했다.
지하철 타기부터 헷갈림의 연속, 비싼 물가를 체감하며 놀랐지만 걱정과는 달리,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그리고 일말의 불편함이라곤 없이 행복한 여정이 계속되었다. 선생님들은 어느덧 친한 이모, 삼촌처럼 의지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갔다.
청주에서 오사카 간사이공항, 1시간도 걸리지 않는 비행시간으로 다른 나라에 왔다. 빠듯한 여행 일정, 오사카 성, 도톤보리, 전망대.. 시내 관광보다 기다려지고 재미있는 건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며 일본 맥주를 골라마시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맛있는 음식과 진솔한 이야기들,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인간은 각자의 아픔과 시련을 겪으며 살아가고, 또 그 아픔을 치유하며 성장한다는 진리도 새삼 다시 한번 일깨웠던 밤들이 지나갔다.
처음 온 공간, 처음으로 여행을 함께하는 사람들, 인생의 선배들과 하는 여행으로 그렇게 또 한 겹의 추억을 쌓았다.
“다음 여행은 중국으로 가시죠!”
다음 해, 세대통합 여행 계모임 일명 ‘다시다’는 중국 칭다오로 여행 계획을 잡았다.
이번에도 예산은 인당 30만 원. 2박 3일 일정으로 알찬 여행. 이번엔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내가 가이드를 맡아 숙소와 비자,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배려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참 신기한 일이다. 어쩌면 잠시 스쳐가는 인연이었을 어린 기간제 교사. 그 잠깐의 인연을 잡아준 사람들. 만약 내가 일본 여행을 거절했다면, 다음 해에 순회를 가지 않았으니 우리들의 인연도 거기까지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수련원에서 함께 만두를 빚으며 쏟아지는 별을 보는 일이 있었을까, 칭다오맥주박물관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인생 맥주를 마실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인연으로 지금의 남편과 만날 수 있었을까?
나의 선택은 또 다른 선택을 낳고, 다른 인연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게 하는 바탕이 되어간다.
마치 처음엔 어떤 그림인지 모르고 맞추기 시작하는 퍼즐처럼 말이다.
마지막 한 조각을 맞출 때가 되어야 비로소 모든 조각들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조각이었음을 알게 되지 않는가.
매일 같은 일상 같지만 우린 매번 다른 사람들을 마주치며, 다른 인연들을 만들어 간다.
어쩌면 반복되는 지루한 인생에서 선택이 만든 선물 같은 인연들이 있어. 살아가는 일이 더 값지고 빛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