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슝이모 Nov 13. 2022

오늘도 천사력을 상실했습니다.

태국 고등학교 교사, 태국에서 현명하게 살아가기


1.

외국인으로 태국에서 교사 임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전투를 감당해낼 줄 아는 잡다한 능력이 요구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교실 내 찜통더위도 달갑게 느끼며 수업을 온전히 끝내는 인내력.

들쭉날쭉 수업 일정으로 인해 쾌변과는 영 멀어지는 장 건강을 다스릴 줄 아는 장 통솔력.

태국어 물결만이 흐르는 교무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히 추측하고 화를 모면하는 눈치력.

수업시간, 잡담과 유튜브 시청, 꿀잠, 페북 라이브 녹화 등의 만행을 일삼거나 책을 읽어보라고 하면 ‘한글 모르는데요’하고 대답하는 학생들을 자애롭게 품을 줄 아는 천사력.     


적재적소에 이러한 능력들을 순발력 있게 꺼내 쓰다 보면 하루하루가 참 짧게 느껴진다.     


2.

인내력.

더위에 땀 흘리며 수업하기를 몇 달. 시간이 지나니 그 인내력이 향상되었는지 이제는 수업 중 더위가 덜 성가시다.

그런데 이날의 문제는 복장 불량에서 일어났다.

동네 시장에서 새로 산 연두색 옷을 입었는데 이게 웬일, 땀에 젖은 부위가 두드러지게 티가 나는 거다.

그 덕에 생긴 겨드랑이 부위에 진한 녹색 하트가 커다랗게 생겼다.

상황이 이러니 나는 이날 수업 내내 최대한 팔을 들지 않으려 칠판 판서를 포기하고는 전 수업을 PPT로 해야만 했다.

태국 옷감들 중에는 이렇게 물기에 색이 변하는 재질이 많다.

출근할 옷은 물기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미리미리 확인하자!     


3.

장 통솔력.

아침 1교시부터 수업이 있는 날이면 나의 예민한 장은 움직임을 알아서 멈추는 듯하다.   

며칠 연속 화장실을 못 가는 날도 생긴다.

내 장기를 내가 통솔하지 못하는 이 상황이 참 서글프다.

태국에 유명한 변비차, 일명 ‘태국 똥차’가 있다는데.

이미 한국 관광객들에게도 유명해져서 태국 여행 시 필수로 쟁여간다는데.

내성이 무서워 계속 피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힘을 현명하게 빌려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게 한국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진 '태국 똥차'다



4.

눈치력.

이날은 학교 행사가 있어 교사 전원이 하얀색 옷으로 챙겨 입고 오는 날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정보가 나에게까지 전달이 되지 않았다는 거다.

전날 교무실에서 한 태국 교사가 태국어로 무언가를 공지했는데, 그 얘기였나 보다.

그래서 하필 이날 나만 색깔 옷, 그것도 땀이 배는 부위가 녹색으로 변하는 연두색 옷을 입고 있었다.

외국인 교사니까 뭐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기는 분위기였다지만, 내 모습이 민망했던 나는 수업 시간 이외에는 내내 교무실 책상 앞에 껌딱지처럼 앉아있었다.

교무실 내에서 뭔가 얘기가 돌고 있다 싶으면 재빨리 눈치채고 화를 모면하는 눈치력,  부단히 갈고닦아야 할 능력이다.     


5.

천사력.

고 1 교양반 수업시간이었다.

교양반 수업은 보통 태국인 한국어 교사가 함께 들어가 통역을 해주는데 이날은 그녀가 휴가를 내서 나 혼자 수업을 했다.

태국인 교사가 없어지면 교양반 학생들은 보통 자세가 확 달라진다.

외국인 교사에게는 좀 무례해진다고나 할까.

수업 참여도 대충대충.

수업시간 잡담과 유튜브 시청자가 더 많아진다.


이날은 새롭게 단어 열두 개를 학습했다.

이 단어를 그림과 함께 기억하면 좋겠구나 싶어서 학생들에게 A4 용지를 한 장씩 나눠주고 그 앞 뒷면에 각각 단어 6개씩을 그리고 글을 써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이를 6등분으로 접어야 했다.

종이를 6등분으로 접는 것부터 난관이 될 줄이야.

학생들은 자기는 6등분으로 접지 못하니 나보고 접어 달라는 거다.

“우선 이렇게 세로로 반을 접고, 그다음 가로로 삼등분해요!”

내가 접은 걸 보여주는데도 학생들은 못 하겠다며 “선생님! 선생님!” 여기저기서 나를 입으로 손으로 부르며 종이를 내민다.

일부는 정말 못하는 거고 일부는 수업시간 활동이 뭐든 귀찮은 거다.

이제부터는 기싸움이다.

나는 팔짱을 끼고는 선생님이 한 대로 너희가 직접 해보라고 종용했다.

나를 따라 팔짱까지 끼는 학생들을 본 나는 내 천사력이 상실되어가는 걸 느꼈다.

내 목소리에 화가 실리고 있다는 걸 느낀 나는 잠시 침묵했다.

복식 호흡으로 나를 달래며 내 천사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여러분, 이거 스스로 접고 그림이랑 글 먼저 쓰는 사람 10명에게는 선생님이 맛있는 과자를 줄 거예요.”

미운 아이 떡 하나 주는 심정으로, 맛있어서 교무실 서랍 속에 넣어두고 아껴 먹던 쿠키를 학생들에게 걸었다.

그제야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매번 학생들에게 이렇게 당근을 줄 수는 없지만, 매번 학생들과의 기싸움에서 화만 낼 수는 없는 법이다.

천사력이 바닥을 보일 때마다 평정심을 재빨리 되찾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은 내게 여전히 크나큰 과제다.



6.


그나저나, 교양반 학생들이 쓴 한글을 보니 아직은 한글도 그림처럼 그리는 수준이고 한글 자모를 여전히 제대로 쓰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걸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쓴 글자를 보니 책에 쓰인 글자를 보고 따라 쓴(그린) 건데도 특히 '열쇠'를 가장 괴기하게 쓴다는 걸 알았다.

모음 ‘ㅚ’를 저리 쓰는데, 이중모음 모양은 또 얼마나 괴기할꼬.

이미 1학기 내내 자음과 모음을 쓰고 익히기만 한 반인데도 상황이 이렇다.

음.  계속 한글에 노출되다 보면 언젠가는 한글과 친해지겠지?

갈 길이 멀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고 싶었어, 얘들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