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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세 Jul 28. 2023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글과 바이러스

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The History of Love)'

제목만 보고는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인류의 조상 시절부터 인간은 사랑을 어떻게 발견하고, 발전시켜 왔는지 이런 거대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이야기 안에는 늙고, 아프고, 매력이라고는 1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괴팍한 할아버지 레오의 비좁은 아파트에서 시작한다. 그렇지만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 할아버지가 만들어온 사랑을, 이 할아버지를 통해 연결되는 사랑을,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위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단, 하나의 거대한 조건이 있었으니 할아버지 레오는 글을 썼다는 것이다. 


레오와 앨마는 폴란드의 작은 시골마을 한 동네에 살면서 같은 학교에 다녔다. 많은 사랑이 그렇게 시작되듯 어느 날 갑자기 앨마에 대한 사랑을 발견한 레오, 시간이 지나 앨마도 레오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면서 '사랑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글쓰기를 좋아했던 레오는 그의 글을 항상 앨마에게 보여주곤 했는데, 이때 썼던 소설('사랑의 역사')은 지구의 반 바퀴를 돌고, 거의 60년이 흐르면서 누군가에게는 역사적이고 화려했던 사랑의 현장과 순간에 함께 있었다. 


소설 속 또 다른 앨마와 그녀의 엄마, 레오의 친구였던 리트비노프까지 다른 공간, 다른 시간의 그들이지만, '사랑의 역사'라는 책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소설 밖 나 또한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있던 상상과 생각이 문자화되면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게 되고, 이러한 글을 매개로 그 안에 실린 사랑 또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마치 바이러스를 매개로 그 안의 유전자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게 되는 것과 같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팬데믹의 공포를 겪었지만, 이번에 나는 바이러스의 순기능을 이야기하고 싶다. 바이러스는 인간과 같은 숙주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고, 복제하게 되는데, 간혹 바이러스의 유전자는 인간의 유전체 안에 끼어들어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게 된다. 아주 오래전, 한 때 인간을 공격했던 바이러스는 긴 시간이 흘러 오히려 인간을 보호하게 되는데, 이러한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우리 인간의 유전체 코드 안에 새겨져 계속 유지되고 있다.


인간 유전체 시퀀싱 기술이 발전하고, 그 비용이 저렴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전체 정보를 읽어내는 서비스를 받고 있다. 이러면서 인간 유전체 안에 의외로 바이러스 유래 유전자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왜 그런지는 잘 몰랐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서 이런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인간의 태아 발달, 바이러스 감염, 면역반응 과정에서 우리 몸에 침투한 바이러스를 막아낸다는 것이 알려졌다.


현재 우리 몸 외부의 바이러스(예를 들면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같은)가 몸 안에 침입하기 위해서는 인체세포 표면의 수용체와 결합해야 한다. 그런데 오래전 우리 유전체에 들어온 바이러스의 유전자는 인체세포 표면의 수용체를 두고 외부의 유해한 바이러스와 경쟁하는 원리로 우리 몸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인체에 침투한 바이러스가 오랜 시간을 두고 진화하고, 길들여지면서 거꾸로 방어군이 된 셈이다. 

출처 : Science, Stealing genes and facing consequences, 2022.10.27 / 사이언스조선, 왜군 물리친 항왜처럼 바이러스 막는 바이러스, 2022.11.1


나에게도 아이가 하나 있으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유전자를 남겼다고 해야 할까? 오로지 나만의 유전자는 아니지만 내 유전자는 언제까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것이고, 금방 잊을 것 같지만 오늘 이 아침에는 상상을 더해 본다. 부디 선하고 좋은 유전자만 전달되기를, 그리고 시간을 지나고, 공간을 거쳐가면서 더욱 선하고, 더욱 유쾌해지기를 욕심 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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