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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돌과 소각장

- 핫한 연말과 매캐한 새해 -

by 린ㅡ Mar 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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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니까. 한 해의 끝자락, 빨래더미는 골이 난 듯 부풀어 있었다. 서둘러 옷들을 색깔별로, 재질별로 나누어선 조물조물 빨래를 마쳤다. 창살 삼아 여물게 닫아두었던 버티컬을 올려 바람이 통하게 널어두고 나니, 퍽 서글펐다. 한 해가 모두 흘러가버렸구나.


한해의 일기장이 축축했고 글자가 번져서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종이는 우글우글하게 빳빳이 굳어버렸고 번진 자욱마저 주글주글하게 판판히도 자리 잡았다. 이전으로 돌릴 수가 없다. 고쳐볼 수도, 다시 쓸 수도 없다. 그땐 몰라서 끄적거렸고 이젠 알아볼 수가 없어 만지작거려 보지만, 여전히 어느 것도 알지 못하겠다.



언제나처럼 적막한 거실에 웅크려 앉았다. 마음이 울적해질 때면 내가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것, 기어코 웅크려선 최대한 움츠려 들어야 한다. 거대한 우울이 가만하게 지나갈 때까지. 한참이 지나면 무릎이 아프고 발이 저려올 것이므로. 그러면 고통을 감지하다 시간을 감각할 수 있고, 잠시나마 헤쳐진 기분을 잊고선 슬픔 어린 고통을 달랠 수 있으니. 최선을 다해 무릎 사이로 목을 넣어 가슴에 파묻고 등을 동그랗게 말아선 차가운 발끝과 손끝을 맞잡고 힘껏 그러쥔다.


버티컬 사이로 새해의 햇살이 들어와  뒤를 따뜻하게 감쌌지만, 하필 그것을 맞아줄 기운이 내겐 없었으므로 모른 척하고 말았다.



축축해지는 일이 싫었다. 삭하게 말려진 낙엽이고 싶었다. 삭한 낙엽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서글퍼 낙엽을 밟지 않으려 구불구불한 슬픔을 피해선 홀로 한해를 지냈다. 밤과 다르지 않은 낮과 하염없이 반짝이던 눈물만이 살게 했다. 슬픔과 눈물은 달랐고, 깨어있는 일과 살아있는 일은 다르지 않았다.


새해의 힘을 빌어 당신이 들려주는 넌 해낼 수 있어라는 말은 결국 내 귓속을 통과하지 못했다. 날아오는 돌멩이를 의식 없이 막아내듯 응당 걷어차고 나니, 그것은 한 번도 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한 문장이었고 이해할 수 없는 글자들일뿐.


그런 가 진심을 담아 당신의 입모양을 따라 전한다면 그것은 과연 당신에게 온전히 착할 수 있을까. 마음을 잃은 자가 전하는 사랑엔 힘이 있는가. 하많은 무용한 것들 중 하나일 뿐인가. 단단한 문장마저 이내 눈물이 되고 말았다.




우울벽을 단단히 올려 홀로 오래도록 갇혀 있으면 선과 악에 대한 판단조차 모호해질 때가 있다. 그래서 꺼낼 수 없는 이야기들. 이야기 자체가 나쁜 빛띠어서는 아니다. 특별하거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 아니고, 그저 그런 이야기.


그저 그런 이야기에 꺼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고이 올려놓은 것뿐이다. 내겐 몹시도 예사로운 이야기가 혹여 당신에게 생체기를 낼까 봐, 결코 꺼내어지지 않게 'X'로 표기된 마음돌로 지그시 눌러놓은 것일 뿐. 마음속 소각장으로 달려갔다. 눌러놓은 마음들을 새로운 해에 데려가고 싶지 으므로.


모르게 생겨버린 나쁜 마음들은 몸집이 커지기 전에 마음소각장에 곧장 버렸다. 다시는 피어오르지 못하도록 가맣게. 기어코 태워버렸다.


한 해의 마지막엔 마음돌로 지그시 눌러놓은 그저 그런 이야기들마저 버려본다. 버려지지 않으려 엉겨 붙어선 안간힘을 쓰지만 가차없이 내동댕이 친다. 아니, 그러고 싶다. 예사로운 척 정갈하게 지워버리고 싶다.



소각으로 인한 매캐한 연기 탓에 한동안 눈물이 흐를 테지만, 깨끗하게 피어오르고 정갈하게 비워지길. 무엇않길. 나쁜 것도, 좋은 것도. 그런 것은 애초에 없었으니. 나 또한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아닌 것처럼. 그저 나인 것처럼. 나의 이야기도 나쁘거나 좋은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니 그저 그런 이야기는 그저 그렇게 사라지길.


너무 많은 것들을 태워버려야 하는 탓에 마음 가득 연기가 그뜩했다. 그럼 밖으로 나가야지. 연기로 눈뿌리가 시큰거리는 건가. 오랜만에 세상 밖으로 나오려니 시큰해지는 건가. 집 안의 가장 밝은 곳의 명도는 바깥의 가장 낮은 명도를 따라갈 수 없는 일.


집은, 내가 몇 년간 머물렀던 이곳은 과연 캄캄한 동굴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마는 순간. 눈물 나게 아름다웠던 바깥에 망그러진 마음을 차마 두고 오지 못했다. 안으로, 집으로 다시 가져온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할까.




무엇이든 해낼 거라는 당신의 다정했던 문장 하릴없이 곱씹으며, 세상으로 나갈 준비가 언제고 되지 않는 나는, 지난 다짐들 위로 새해의 결심을 눌러 적었다. 


"첫 번째, 아직 안 돼요."

꾸역꾸역 적어낸 나의 결심을 보고 아이는 첫 번째부터 잘랐다. 일을 시작해 보겠다는 나의 호기로운 다짐을 단칼에 베어냈다. 그의 마음속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열어 보고 싶지 않았고, 그럴 필요가 없었다. 롱한 눈동자와 투명한 네 마음에 맹렬히 일렁거렸으므로.



사직 후 3년이 꼬박 지났다. 밖으로 나가는 일은 여전히 어렵고 두려운 마음은 두툼해다. 염치없이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고, 어쩔 수 없이 전하지 못한 마음은 이곳에 글로 남겨 언젠가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다.


밖으로 나서는 엄마를 기꺼이 응원할 수 있도록 단단한 사람이 되겠다고 베어진 다짐 위에 다시 다짐해 본다. 스러져가는 용기를 담아 네게 한껏 미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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