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여운 흑염소와 귀엽지 못한 나를 놓아주세요 -
오랫동안 나는 엄마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목 끝까지 잘방거리는 우울이 넘어오지 못하게 울울한 미소가면으로 잠가둔 모습이 유난히도 닮았다고, 오래도록 착각했다.
내게 가장 선연하게 남은 엄마의 시간에 도착하고 보니, 우리는 실컷 다르고 사뭇 달랐다.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아 과감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사람, 스릴을 좋아하여 담대함이 불안보다 힘이 센 사람,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도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좋아하는 사람. 결코 몰랐고 이제야 알았다.
나와 정반대의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우울은 '우울'로 형상화된 두 글자처럼 한 가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의 형태나 기질은 물색없이 달랐다. 각자의 표피를 김으로 삼아 우울의 알갱이를 밥을 눌러 펴듯 낱낱이 깔고선 본인의 취향껏 속을 채워 담는 것. 우울은 아무도 보지 못하게 몸속에 말아둔 자신만의 비밀한 김밥이었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들키지 않도록, 터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는 것. 과도하게 속을 채워 넣으면 안 된다는 것. 비울 때가 오면 비수한 곳을 찾아 기어코 비워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우울자의 앞에서는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 특히 당신의 앞에서는.
쾅!
이른 아침부터 묵직한 택배상자가 던져졌다. 좀처럼 택배를 시키지 않는 내게 집 앞으로 광활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는 공포스러웠다. 문을 열었다.
거대한 상자, 뾰조록한 부추가 그려진 예민한 상자, 투명테이프를 미라처럼 감아둔 새파랗게 하얀 상자. 보내는 이는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고, 받는 이도 나의 이름과는 달랐다. 품목에는 식품이라고 적혀있다. 나는 손이 없다 싶을 정도로 손이 작은 사람이므로 이렇게 거대한 식품을 주문했을 리가 없다. 기사님께 말씀드려 회수를 요청하고, 엄마의 생일선물을 고르려 이르게 집을 나섰다.
눈앞으로 다가온 엄마의 생일. 생각날 때마다 모아둔 조구마한 생필품과 책 한 권을 준비해 두었으니, 박스의 나머지 부분은 당신이 좋아할 만한 신상품으로 채우면 될 것 같아 집을 나섰다. 번져가던 묵직한 소리를 잊지 못한 채.
점심시간 즈음, 엄마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흑염소 진액을 보냈으니 챙겨 먹으라는 문자. 아침에 돌려보낸 택배가 떠올랐고, 곧장 전화했다. 보낸 이는 가게 사장님의 이름이었을 테고, 나의 이름은 올곧이 발음하기 어려운 음절의 조합이라 잘못 받아 적으신 듯했다. 전화번호는 엄마의 것으로 기입되어 있었겠지.
우연한 실수가 유난하게 겹쳐 버린 일. 그럼에도 하릴없이 쏟아지는 당신의 분노와 넘쳐버린 눈물. 반품했다는 나의 말에 엄마는 크게 화를 냈고 울먹였으며 진정시키려 엄마를 여러 번 불렀지만, 격양된 당신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너는 도대체!! 왜.. 참..."
도대체, 왜, 참, 울까. 왜 내게만, 울까. 아무것도 아닌 일은 그저 그렇게 놓아버리면 안 될까. 사소한 진창에도 울음이 가득한 사람은 예고 없이 던져지는 것들에 가두었던 것들이 못나게 터지고 만다. 사람들도 그랬다. 편해서, 좋아서, 허울 좋은 이유들만 앞세워 내게는 쉬이 토해냈다. 좋은 일들은 삼켜내고, 그렇지 못한 일들만. "네가 좋은 사람이라 그런가 봐."라든가.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그저 사람이었고, 나도 사람이었다.
직장에 다닐 때였다. 전화든 방문이든 온갖 말과 행동으로 겁박받을 때면 그만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험상궂은 소리로 대하는 사람보다 벗겨지지 않는 미소가면을 쓴 내게 더욱 광분했고, 더욱 울부짖었으며, 쉬이 감정이 격양되었다.
좋은 사람과 어려운 사람은 어울리지 않았고, 좋은 사람과 쉬운 사람은 잘 어울렸으므로 쉬워 보이는 나는 쉬이 그래도 되는 사람으로 무참하게 전락하고 말았다.
차즘 건강이 나빠졌고 엄마 앞에서 쓰러진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그만두고 싶다는 나의 말에 부모님은 분노했다. 다음엔 암흑빛의 흑염소 진액이 도착했다.
싫었다. 나의 마음이 가닿지 못했던 것처럼 당신이 전한 흑염소의 위로는 내게 통하지 않았다. 나는 속이 좋지 않아 고기를 먹지 않고 마시는 것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이것을 먹어도 별 소용이 없더라고도, 이제 다시는 이것을 보내지 말아 달라고 여러 번 청했다.
쓸쓸한 나의 문장 중에 조구마한 문장부호 하나라도 가닿길 바라며 간곡히 청했고, 전부 무용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오랫동안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곳에서 소리 없이 소리 내는 기분, 그것이 싫었고, 여전히 속이 너울거린다.
별하지 않은 일. 별것 아닌 일상에 꼭꼭 말아두었던 못된 기억속이 터져 마음에 쓰나미가 인다. 숨겨놓은 기억조각들이 지저분히 나뒹굴고, 터져버린 우울의 표피는 혐오스럽다. 여전히 나약한 내 마음의 표피를 탓하다, 탐욕스레 담아둔 충만한 옹졸함에 실망하다, 결국엔 불변한 나를 미워하며, 어리석은 울울함을 모아 다시 말아 두었다.
집밖으로 나온 탓이라며, 눈앞이 아른거리고 목구멍이 꾸역거려 어서 선물을 골라 돌아왔다. 집 앞에는 새까만 액체로 가득 찬 새하얀 박스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을 선물하여도 가닿지 못할 수 있구나. 엄마에게 보낼 선물박스의 벌어진 입을 모아 닫으며 새삼 두려워졌다.
우리의 시간이 모래시계를 엎어놓은 것처럼 하르르 사라지고 있다. 오늘은 흑염소가 소란하게 들어와 한 움큼 훔쳐간 탓에 더욱 가파르게 시간을 잃어버렸다.
쉬지 않고 소멸하는 우리의 남은 시간이 그저 사랑이면 좋겠다. 서툴게 서두르는 애정이나 애쓰고 애씌우는 고로한 노력 따위가 아니라, 사랑 말고는 어떤 것도 침범하지 못하는 고요하고 안온한, 잔잔하고 나지막한 사랑이면 좋겠다고. 기도하듯 선물을 보냈다.
언제나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부디 선물 사이사이 숨겨둔 아릿한 사랑들을 어렵지 않게 알아채주길 바라본다. 고백하지 못한 사랑을 다시 한번 고백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