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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ㅡ Jan 08. 2024

조금 늦은 2023년의 시상식

- 사소함의 위대함 -


두고두고 떠오르순간이 있다.


매일 라면을 섭취하고 있으니 연관 이미지처럼 매번 내 머릿속에서만 피어나는 것일 수도 있고. 유독 소소한 것들에 홀려버리는 나의 성격상 그것이 완벽히 들어맞았을 수도 있겠고. 아니면 이런 나를 아는 그가 무심한 척 철저하게 염두에 둔 덫에 힘없이 걸려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한 해 동안 내게 보여주었당신의 고약한 일들을 정갈하게 지워낼 만큼 대단하고도 사소했던 일이었기에 이곳에서 나만의 시상식을 열어 언젠가 당신이 미워질 때 꺼내어보련다.




"라면 맛있게 끓여줄게."

화실에 가려고 종종거리던 내게 그가 말했다. 거의 모든 날들의 점심을 라면으로 섭취한 지 3년 차인 내게. 감히. 포롱포롱 신이 난 그의 눈빛을 보니 거절하기엔 이미 늦었음을 알았다.


뽀얗게 눈앞을 가리던 김이 걷히고, 나는 단번에 알아챘다. 당신이 내어온 라면 한 그릇엔 건더기 수프에 들어있는 고기조각들이 부재하다는 것을.




오랜 트라우마로 고기를 먹지 못한다.

고통스럽게 게워냈던 기억 덕분으로. 


특히 고기의 거칠고 터실터실한 질감참기가 어렵고 결국에는 모두 게워내어야 끝이 나니, 고기와 유사한 친구들도 절대 사절이다. 그렇기에 라면의 건더기수프에 들어있는 고기조각이 그저 콩으로 만든 거짓고기라고 해도 제대로 현해 낸 그 질감 때문에 입에 들어오면 뱉어내야 했다.


그 조구마한 몇 조각이 입맛을 가시게 했으므로 끓일 때마다 하나하나 정성스레 구조하여 으밀아밀 버렸다. 혹여 그 모습이 누군가의 입맛을 버리게 하거나 이런 나의 모습이 요란스러워 보일까 봐 몰래 숨겨온 일인데, 어떻게 알았을까.


유난히 기쁨의 감정만큼은 감추질 못하는 그가 기세가 등등하여 따북따북 소곤거렸다.

"네가 싫어하는 거 다 건져냈어. 마음껏 먹어."


별 것 아닌 그 일이 얼마나 새삼스럽고 잔망스럽게 귀찮은 일인지 나는 안다. 언제나 해왔던 일이자, 할 때마다 몹시 성가신 일이었므로. 


그것이 내가 주로 해물라면을 섭취하는 이유이다. 그것 안에는 고기조각이 없으니 별도의 조작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 해물라면의 세일기간이 끝나면 별수 없이 고기조각을 품었다 할지라도 할인 중인 라면고르게 되는 것이다.


여하간에 당신이  위해 해주었던 잔망스러운 일이 이상하리만치 여러 번 떠올랐다. 


음식점에서 라면을 시켜도 그 조각들 때문에 맘껏 먹지를 못했는데, 오랜만에 타인이 끓여준 라면을 마음 편히 먹어본 탓일까. 기묘하게도 그날따라 라면이 유독 끓여진 탓인가. 그 다정한 고기조각 구조작업이 맘에 걸려서 그런가.


분명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님에도 고급 레스토랑을 방문한 일보다 사무치게 남았.


이것이 당신에게 상을 수여하는 첫 번째 이유이다. 이렇게 고 나면 갓 열어낸 탄산음료의 기포처럼 내내 피어오르는 감사함이 조금 덜어지지 않을까.




이에 더하여 지난해엔 주로 밤에 그림을 그렸던 탓에 당신이 출근할 즈음 나는 자러 가곤 했다. 신혼 때부터 쓰고 있는 돌침대는 겨울이면 여간 차가운 게 아니다. 그야말로 종일 얼음돌이 되어 있으므로 자러 가기 전에 예열을 해두어야 한다.


하지만 이 스크루지는 언제 잠들지 확실히 알 수 없고 예열하는데 드는 전기요금이 아까웠던 탓에 잠시동안의 차가움은 다소곳이 견디곤 했다. 그것을 알아챈 그가 언젠가부터 자는 중에 깨어 늘 나머지 반쪽 침대를 예열해 두었고, 그 덕분으로 언제나 나는 따뜻한 곳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삑'

전원버튼을 한 번 눌러주는 일. 물리적으로는 매우 단순하여 쉬워 보이는 일인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여간 신경이 쓰이고 귀찮은 일이 아니다. 


내가 눈치챌까 봐 자러 들어가자마자 눌러두진 못했을 것이고, 자는 중에 이것저것 확인한 뒤 매일 밤 상대를 위해 하던 일. 그것이 습관처럼 의식을 거치지 않고 행해진 일이든, 잠을 설치다 얄궂게 손이 닿았든, 그저 감사했다.


당신의 다정함 덕분으로 이번 겨울은 시작부터 따사로이 보내고 있다. 조금 헤퍼진 전기요금이 맘에 걸리긴 하지만, 당신의 다정함을 한껏 느껴보련다.


이제 스크루지처럼 살기 싫다.

다정함이 헤픈 당신 때문에.




'고기조각 구조작업'이든, '돌침대 예열작업'이든, 이 모든 것들이 사소함을 좋아하는 이 소심이의 코드에 잘 맞아서였겠지만,  기괴한 취향을 15년 만에 알아채고 세심하게 디테일을 맞춰준 당신에게 참으로 고마웠다. 


이 많은 글자들을 모아 이곳에서라도 시상식을 열어 주고 싶을 만큼 마음에 따스하게 닿았던 일. 소소함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앞으로 우리의 날들에 이 정도의 소소함만 있어준다면 그야말로 충만하게 행복하지 않을까.



매번 내가 더욱 배려하고 살핀다고 생각했던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살펴온 것이지 누가 덜하고 더하고는 없는 것이다.


작은 것을 살펴준 마음은 결코 작지 않았다. 2023년 한 해 동안 당신을 살펴온 나의 사소함들 중에 과연 당신의 마음에 일이 있으려나.


아쉽게도 떠오르는 일이 다면 새해에는 내가 당신을 역전해 보아야지. 소심이는 소소하고 사소한 것들에는 전문이니까. 


부디 당신이 잘 알아채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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