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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ㅡ Jan 25. 2024

성. 공. 한 엄마

- 그렇다면, 너도 할 수 있어! -


"엄만 이미 성공했잖아. 좋아하는 걸 찾았으니까."


성공이라. 살아오며 처음 들어본 문장이라 단번에 해석이 되지 않았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문장이 하릴없이 생소하여 음절의 형태로 낱낱이 흩어지는 것을 간신히 잡아 곱씹어본다.





사직을 하고 나서는 방 한 구석에 푹 주저앉은 못난이 인형처럼 시간을 보냈다. 홀로였다면 내내 그렇게 지낼 수 있었으려나. 하나 내겐 문틈 사이 열심히 나를 확인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마음이 깊은 곳으로 꺼져갔다.


막연한 공포나 쓸쓸함과 같은 것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살다 보면 힘든 때도 있는 거라며 소담스러운 말들로 위로를 둘러주던 위연엄마는 과연 없었다. 진이 빠져 녹아내린, 형체를 잃어버린 무언가는 있었고.

 

기운이 없었다. 무기력하다는 단어보다 더욱 기운이 없었다. 꾸역꾸역 젤리처럼 녹아내린 몸을 거실까지 끌어앉고는 부러 끄적거렸다. 그들이 나를 위해 하는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 적어도 그들과 동일한 공간에 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마침 그림. 말을  필요가 없고 열어놓은 스케치북 위에 색연필 몇 자루만 꺼내면 되는 일. 거실이라는 같은 공간 속에서 각자의 조그마한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든 숙제를 하든 그림을 그리든 하고 싶은 것을 했다.


곁눈질로 어렴풋이 느껴지는 나의 테두리만으로도 들은 덜 불안해 보였다. 혼자 한 구석에 박혀 시선을 잃고 헤매는 엄마를 애써 확인하는 것보다 같은 공간에서 무어라도 끄적거리는 나를 볼 때, 그들은 훨씬 온해 보였다.





말을 내기 어려워하고 조용히 숨어버리는 두 번째 아이 앞에서는 더욱 기운을 내어 부러 끄적거렸다. 엄마는 말로 잘 내어지지 않을 때 그림으로 내면 마음이 보드라워진다는 말도 흘려보면서.


밖으로 나가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며 언제나 혼자 지내는 아이가 간혹 눈물을 흘릴 때면, 슬픔을 느낄 겨를 없이 무언가를 해보길 바랐다. 종이에라도 꺼내어 보면 답답함이 덜어지지 않을까. 부디 어떤 형태로든 너의 마음을 보며 나누고 싶었다.



언젠가부터 틈이 나면 그도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깊이깊이 외롭고 심심하여 시작한 일. 건식재료를 좋아하는 나와는 달랐다. 물을 좋아하는 그는 물감과 붓으로 벽지와 옷들을 난장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그것이 그의 슬픔지우개가 되어준다면 그까짓 거 별거 아니었다.


그림에 형태도 없고 그저 물장난으로 보였지만, 그것이 그의 친구가 되어주는 거라면 그대로 좋았다.





"엄마, 오늘 친구가 나한테 말 걸었어. 엄마는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길래, 화가라고 했지. 나도 화가가 될 거야. 난 그림을 그리면 행복해지거든."


이것이 슬픈 문장인가. 나는 왜 '화가'라는 이 두 음절 앞에서 완벽하게 소멸되는 느낌인가. 뭐라고 말해주면 좋을까. 나는 과연 내가 화가인지 스스로에게 되물어 보았다.




그래. 내가 아이에게 처음 '화가'라는 단어를 일러줄 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니 그의 눈에 비친 엄마는 틈만 나면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야말로 화가인 것이다. 일러준 의미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단어. 


그것이 주방 앞 거실 한쪽 구석에서 이루어지는 초라한 모습일지라도,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작품들일지라도, 생계유지가 불가능한 직업적 가치가 없는 일이라도 아무 상관이 없는 일. 아이의 시선에서  단어의 의미는 어른의 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내가 일러준 단순하고도 명징하게 함축된 그 단어, 너에게만은 내가 '화가'였다. 네 덕분에 이제야, 아니 벌써, 꿈을 이루고 말았다.




해보고 싶은 일을 처음으로 용기 내어했던 일. 그것이 그리는 일이었다. 내가 가진 문장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그림을 그리며 채도가 낮은 시간들을 안온하게 흘려보낼 수 있었다. 행복과 엉망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다.



아이나를 '성공'이라는 단어로 어르며 다정한 마법을 부린 것처럼 너도 그 이상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는 일을 찾아내길. 부디 함께 꿈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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