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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ㅡ Dec 22. 2023

"사랑해"

- 쉽지 않은 말, 마법 같은 말 -


흠결이 없는 삶은 없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수도 없던 나의 흠결들을 몹시 자연스럽게 고백해야지.


살다 보면 그런 때도 있는 거다.




'사랑해'라는 말은 마법 같은 힘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막연히 믿었다. 겪어보지 못했으므로. 그저 환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던 사직의 무렵, 삶에 지쳐 죽은 듯이 살아있던 그, 난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없었다. 내 안이 덕지덕지 비어있었으므로. 따스한 말들과 사랑스러운 시선, 그런 다정한 것들을 나의 몸으로 통과시켜 곱게 내어줄 수 없었다.


온전하지 못했던 정신이 온몸을 지배했던 그때, 난 매일 하루에 한 번 의무적으로라도 "사랑해"라고 아이들에게 말로 내어보기로 다짐했었다. 검은 물감을 뒤집어쓴 듯한 내게서 벗어나고 싶었고, 이것이 흘러 주변으로 번질까 봐 두려웠으므로 무엇이든 해보아야 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요원 부유하마법 같은 말, 그것을 하루에 한 번 소리로 내기.


어느 날엔 아침에 등교할 때 내어보기도 하고, 다른 날엔 자기 전에도 내어보기도 하고. 조금 더 그 단어의 의미에 가깝게 모양을 흉내 낼 수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러울 수 있을 때로 정해 내 안에 내가 없는 날에도 이를 닦는 일과 같이 습관처럼 소리 내었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소리 내지 못했던 날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고작 그 세 음절을 소리내기 어려웠던 때가 있었다.

"사해"



온갖 좋지 않은 것들에 휘감겨 검은색을 뒤집어쓴 내가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고 말로 내었을 때, 내게 표정이라는 것이 있었을까. 의무적으로 내어놓는 세 음절에 사랑 따위의 다정함이 실렸을 리 없으니, 아이들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늘 단 한 음절이었다.


나를 꼭 닮아 표정을 잃은 꼿꼿한 형태의 의무적인 한 음절.

"네."



그러다 더욱 지치고 힘들었던 어느 날에는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이런 말을 해야 할까?' 싶어 그것마저 그만두고 싶었으나, 어렵게 내는 "사랑해"라는 말이 거꾸로  안에 사랑과 유사한 무언가를 쌓아내는  같아 꾸역꾸역 참고 해보기로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것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내가 나를 잃었던 그때, 아이들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그때, 그런 때에는 '내가 잠시 정상적인 범위 밖으로 나와있구나.'라는 것만 인식해도 대단한 일이다. 그것을 알아채어야 해결할 마음을 먹을 테니.  작은 일이 모든 변화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의무적으로 돌아오던 아이들의 "네."라는 . 아무것도 담지 못한 그들의 표정과 공허한 음성을 들으며, 다행히도 허물어  닮아갈 아이들이 스쳤다. 두려웠다. 그렇기에 아무런 의미를 하지 못할 세 음절이라용기 내어 애면글면 전했다.


어쩌다 소리가 눈물의 형태로 쏟아져 나오는 때에는 잠시 안아주는 일로 대신했다.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흔적 없이 사라지고만 싶었그때, 그것은 내가 아이들을 위해 유일하게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사랑해'라는 글자를 그저 읊어내는 일.




그런 때가 있었기에 나에게 가장 기분 좋았던 아이의 말은 조금 특별하다.


아이가 스스로 집에서 공부하고 있었으므로 해설지는 모두 나의 차지, 아이가 다 풀고 나면 내게 정답과 맞추어달라며 문제집을 가지고 달려왔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그는 한 문제라도 틀리면 순식간에 분노에 휩싸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틀린 문제를 표시한 내게 펄펄거리다 격분한 곰과 비슷한 형태로 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끼익 소리와 함께 그가 두둑한 몸을 반쯤 빼고 남은 몸의 반쪽을 숨기며 또박또박 말을 내었다.


"엄마, 아까 내가 수학문제 틀린 거 엄마한테 짜증내서 미안해요."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엄마, 나 대단하지? 나 이제 내 감정을 솔직하게 말로 할 줄 알아!"


그날 분노에 들끓었던 그가 돌연 새침하게 미소 짓던 모습이 또렷이 기억난다. 민망함과 미안함, 뿌듯함과 행복함... 말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에 휩싸인 그의 고운 눈망울과 에 반만 걸쳐놓은 거대한 몸, 후회스럽고 민망해 꼿꼿이 세워둔 발끝. 분노의 잔해로 남아버린 삐죽삐죽한 머리카락.


고마웠. 다행이라 생각했다. 언제나 부정적인 감정에서만큼은 더욱 솔직하지 못했던 나를 닮지 않은 것 같아서. 마음을 내는 방법을 모르던 나와는 다른 것 같아서. 그렇게 스스로를 단단하게 길러내고 있는 그에게 감동했던 그날, 그 새까맣던 밤의 조각은 나에게 달보드레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날을 시작으로 우리는 서로의 기분을 나누는 일에 조금은 가뿐해졌다.



"사랑해"라는 , 그것은 막연한 환상이 아니었다. 어쩌다 마음이 담기지 못했었더라도 상관없다. 그 세음절 덕분으로 우리 사이에 뽀얗던 안개를 말갛게 걷어내고 칠흑 같던 찰나를 무사히 건너올 수 있었으니.


살다 보면 그런 때가 있다. 내가 나를 버리고 싶을 때라든가 스스로를 이해할 수도 없고 내가 나를 마음대로 부릴 수도 없을 때. 그리고 언제고 그런 때를 다시 마주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순간들을 나눌 준비가 조금은 되어있다.


'화가 나'는 '신나'와 똑같이 중요하다. '슬프다'와 '행복하다'도 마찬가지. 어두운 빛깔을 가진 생각과 밝은 빛의 생각이 똑같이 가치가 있다. 단지 다른 색을 가졌을 뿐. 함께 건너온 무채색의 시간들로 인해 여러 가지 색깔기분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아니 그때보다는 조금 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이제야 우울구덩이에 빠졌던 그때의 날들에 대해 아이들과 솔직하게 이야기 나눌 수도 있다. 아주 조금은. 그리고 네가 깊은 우울구덩이에 빠지는 날이 온대도 내가 곁에 머물며 조금 덜 아프게 꺼내줄 자신도 있다. 아니 조금은 덜 두려워할 자신이 있다.


그렇기에 말해주었다.

"힘들 때 나한테도 말해줘. 엄마가 우울전문가인 거 알? 살다 보면 그런 때도 있는 거야."




우울자에게는 아이와 함께하는 날들 중 지우고픈 날들이 수도 없다. 그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 같아 많은 날을 자책했다. 하지만 지우고 싶은 마음만큼 반대의 추억들을 겹겹이 쌓아가다 보면 조금씩 절로 지워지더라. 


그러니 힘들 때면 진득하게 힘들면 된다. 나만 잘 잡아두면 된다.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고 도려내고 싶은 시간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고치지 못할 것은 없다. 그저 함께 곱게 빚어나가면 될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해에는  마법 같은 말을 네게 속삭이며 더욱 진득하시간을 나누어 보아야지. 

네가 힘들어 보일 때는 더욱 흐물흐물하게 엉겨 붙어 무한히 부드러워져도 보아야지.

무슨 일이 있대도 그때처럼 다시 용기 내어 보아야지. 그래.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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