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새로이 하는 똑같은 다짐.

십 대와의 동거

by 영웅

오늘 저녁은 아이들에게 화내지 말고 잠들도록 하리라 다짐하고 퇴근한다.

저녁 6시, 아이들이 아직 집에 오지 않았다. 하원했다는 알림이 이제 오는 것 보니 곧 도착할 것이다.

얼른 씻고 옷을 갈아입고 저녁 준비를 한다.

늘 비슷한 평일 저녁의 패턴, 평일 저녁의 다짐

오늘은 정말 아이들이 오자마자 씻으라는 말 하지 않기,

가방 치우라고 말하지 않기,

숙제하라고 말하지 않기,

얼른 자자고 말하지 않기,

꼭 오늘은 먼저 말하지 않고 기다려보기.

언제나 그렇듯 똑같은 다짐을 새로이 한다.


'띠띠띠띠띠 또로로록'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얼른 거실 불을 켜고 아이들을 맞는다.

'왔어~?'

피곤함을 겨우 감추듯 더욱 환하게 지어보는 웃음을 마주하는 아이들의 표정이 썩 좋지가 않다.

"누나가 나 두고 또 먼저 뛰어갔어"

"아니 김서율이 없어져서 나는 그냥 왔지"

오는 내내 이렇게 싸우면서 왔겠구나


한숨을 푹 쉬며 기분 나쁘다는 듯 쿵쿵 거실로 걸어가는 둘째가 가방을 툭 거실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는다.

외투를 그대로 입은 채 식탁 의자에 다리를 올려 걸터앉는다.

둘째는 계속 화나 있고 식탁 위에 올려진 아침에 두고 간 작은 장난감을 만지작만지작한다.


빨리 외투를 벗고 가방에든 물통을 싱크대에 넣고 가방을 제자리에 두고 최소한 손발이라도 씻고 있었으면 좋겠지만 절대 오자마자 씻으라는 말 하지 않기로 다짐했으니까 꾹 눌려본다.

그리곤 아무 말도 안 할 것처럼 말을 한다

"엄마가 집에 오면 뭐부터 하라 했지~?"

콩콩콩 기분이 덜 풀린 채로 양말을 세탁실에 넣고 씻으러 향한다.

일단 씻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식탁을 닦고 싱크대와 조리대 앞을 왔다 갔다 하며 저녁을 바쁘게 차려내는데

계속 발밑에 둘째가 던져놓고 간 가방이 거슬린다.


가방에 든 물병을 결국 내가 꺼내 싱크대에 넣고 잔소리하고 싶지 않아서 후다닥 가방을 거슬리지 않을 만큼 옆으로 밀어 놓는다.

'치우겠지. 치울 거야.' 생각하며


저녁을 차린다. 따뜻하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국에 떡갈비를 구워 샐러드를 잔뜩 내었다.

손발만 씻고 오랬는데 샤워까지 하고 온 둘째가 앉는다. 남편이 앉는다.

첫째가 소파 옆에 서서 만화책을 들고 킥킥 거리며 서있다.

"서안아 밥 먹자"

"응, 이것만"

앉은 식구가 한 술 두 술 밥을 뜨는대도 오지 않는다.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어 얼른 먹자"

"응, 이것만 이것만!"

"김서안"

"진짜 딱 이것만"

서너 장 정도 남을 책을 보여주며 말한다.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서너 장 정도 남았으니 오겠지. 올 거야.' 생각하며


이거 맛있다. 이것도 맛있다.

맛있었던 이야기, 맛있는 이야기, 맛있을 이야기들을 하며 지나가는 저녁 식사를 마쳤다.

남편이 식탁 치우는 것을 돕는다.

돕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해야 되는 것이라는데 우리 집은 아직 돕는다.

저녁상을 차렸으면 설거지는 해줄 법 한데 행주만 들고 요리조리 닦는 것 보니

덥석 고무장갑을 끼지 않는 것을 보니 설거지할 마음도 없는 듯하다.

조용히 그릇을 씻는다.


설거지를 마치고 남편이 두고 간 행주를 다시 헹궈 가스레인지도 찬장도 냉장고도 다시 한번 쓱 닦는다.

둘째의 책가방이 아직 그 자리 그대로 있고 거기서 시선을 돌리면

첫째가 학교에서 돌아온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소파 옆에 서서 만화책을 읽고 있다.

"엄마 우리 요 밑에 도서관 가면 안 돼?"

시계는 월요일 밤 8시를 가리키고 있다.

"그럴래?"

나도 모르게 흔쾌히 그러자고 해버렸다.

대답은 그렇게 하자고 해버리고는 몸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30분만 있다가 가자"

"씻고 가는 건 어때? 아빠랑 같이 가자"

남편이 말했다.

"엄마랑 갈래. 갔다 와서 씻을래"

"엄마 좀 쉬게 아빠랑 가자"

"엄마가 가자고 했잖아. 엄마랑 갈래!"

'그럴래?' 하고 흔쾌히 대답하는 순간부터 실랑이가 시작될 것이란 것을 알았다.

'그럴래?'라는 억지 스런 답 말고

'내일 학교 가는 날인데 너무 늦지 않아?'라는 아이의 짜증스러운 대답만 돌아올게 뻔한 답 말고

그럴싸한 납득 가는 답은 어떤 답이 있을까.

나는 아직 그것을 찾지 못해 서툴고 그래서 여전히 말을 아낀다.

'화내지 말자. 설명하려 하지 말자. 차라리 눈을 감고 있자'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는

"엄마 씻고 올게"

샤워하러 간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딸아이가 남은 떡갈비 하나를 더 달라고 하는 소리가 들린다.

씻고 나왔더니 식탁 위에 큰 아이가 떡갈비 하나에 밥을 먹으며 만화책을 보고 있다.


"엄마, 우리 그냥 내일 갈까?"

"어! 그래 좋다 내일 가자!"


조용히 눈을 감고 씻고 왔더니 평일 저녁 초겨울의 찬바람을 맞으며 도서관을 갈 일이 하루 미뤄졌다.

조용히 눈을 감고 씻고 왔더니 떡갈비가 담겨 있던 그릇을 남편이 씻고 있다.

그릇의 크기보다 물을 더 많이 틀어놓고 씻고 있지만

한참을 씻고는 이거 왜 안 지워지지라고 덜 씻은 채 올려두지만

조용히 눈을 감고 씻고 왔더니 주방일을 하고 있는 남편이 보인다.

조용히 눈을 감고 기다리면 내 입에서 나온 화살에 내가 다시 맞을 일은 없다.


"우리 오늘은 10시에 꼭 자자"

"엄마 나 이거 먹고 씻고 올게" 첫째가 말한다.

"그래"


이래저래 시계가 10시가 가까워진다.

아직 일기를 쓸 생각도 양치를 할 생각도 하지 않는 듯하다.

"얘들아 오늘 우리 10시에 자자~"

둘째가 칫솔에 치약을 짜와서는 돌아다니며 양치를 한다.

문지르지는 않고 한참을 물고서는

"서율아, 양치는 문질러가면서 하는 거잖아"

벌써 매일밤 몇백 번을 말하지만 문지르는 시간보다 물고 있는 시간이 더 많다.

"하고 있어" 하며 잠깐 문지르고

다시 물고 장난치고 있다.

그러면 또 같은 말을 해준다.

"서율아 치카치카 문질러야지"

"하고 있어" 또 잠깐 문지른다.

양치질을 하며 칫솔을 움직이지 않는 것에 대한건 다짐한 적 없으니 맘껏 말한다.

"서율아, 칫솔"

"하고 있어" 또 잠깐.

둘째가 양치질하는 내내 말해줘도 둘째는 내내 닦지 않는다.

양치하는 3분 동안 떠오르는 무궁무진한 생각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면 도저히 안되나 보다.


"엄마 나 숙제할게"

10시 30분이 되어서야 숙제가 있다며 슬슬 꺼내한다는 첫째

저녁 내내 만화책을 읽어 대다 뒹굴다 하더니 이제 한단다.

나는 다짐을 소홀이 하지 않는다.

"그래"

시간도 다시 읊어주지 않은 채 '그래'라고만 말했다.

아이는 투덜대며 숙제를 했다.

숙제가 싫다며 투덜댔지 엄마가 싫다고 투덜대지 않았다.

다행이다.

숙제는 누구나 싫은 거니까 싫어해도 괜찮다.


나는 둘째를 재우고 첫째에게 끝나면 인사하러 올 테니 말해달라 하고 나왔다.

첫째는 속상해하지도 투덜대지도 않았다.

끄덕였다.

그리곤 본인이 해야 되는 숙제만 계속해서 미워했다.


내 모든 조급함을 감추고 첫째의 숙제가 끝나기를 남편과 스트레칭을 하며 기다렸다.

시계가 11시 30분을 가리키자 첫째는 숙제도 잘 준비도 끝내고 곁에 왔다.

"잘 꺼야!? 가자 데려다줄게"

대단히 넓지 않은 집에 대단할 것 없지만 자기 전 아이들을 침대에 데려다주고 이불을 꼭 덮어주는 것

그것은 내가 주고 싶은 사랑이 아니라 아이들이 받고 싶어 하는 사랑이다.

"첫째는 기분 좋은 뒷모습으로 앞장서 걸었다."

"잘 자. 늦었지. 피곤하겠다."

"엄마도 잘 자"


입으로 화살을 쏘는 것은 나의 조급함이고

조용히 눈을 감고 기다리는 것은 상대를 위함이다.

오늘은 위했다.

자기 전 아이의 얼굴 표정이 말해준다.

나의 오늘 하루가 괜찮았는지 아니었는지.




다음날 아침 출근준비를 한다.

초겨울 날의 아침은 침대 밖을 벗어나는 것이 더욱 힘들다.

겨우 일어나 아이들의 물통을 꺼내 물을 받는다.

어제저녁 결국 그 자리 그대로 있는 둘째의 가방에 물통을 넣어놓고 출근을 한다.


오늘도 화살을 쏘지 않겠다.

그간 쏜 화살들이 모두 나에게로 다시 꽂히고서야 화살을 꽂고 매번 다짐한다.


오늘 저녁도 꼭 기다려줘야지. 내 마음까지도.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