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만화가 사와코와 어시스트 토시오는 부부 사이다. 원래는 관계가 반대였다. 토시오가 유명한 만화가였고 사와코는 토시오를 동경해 문하생으로 들어왔다가 결혼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은 입장이 바뀌어서 사와코는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반면 토시오는 5년째 신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차기작을 구상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쉰다. 그리고 사와코의 편집자인 치카와 토시오는 불륜관계이다.
토시오가 신작을 내놓지 못하는 이유는 아내에 대한 열등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정황은 나오지 않지만 누구나 자기가 가르쳤던 제자에게 추월당하면 질투가 생기기 마련이다. 질투를 잘 다스려서 의욕의 원천으로 삼는 경우도 있고 스승과 제자에서 라이벌로 관계가 변하면서 서로의 창작욕을 자극하는 경우도 있지만 질투로 건강한 창작욕이 쇠퇴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재기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서로 안 보는 사이라면 모르겠지만 토시오의 경우는 결혼까지 했으니 거리를 두기도 어렵게 됐다. 이제 그는 자신의 제자이자 아내인 사와코가 자기를 추월해 쭉쭉 올라가는 것을 곁에서 그저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입장이다. 아내의 편집자인 치카와 바람을 피운 건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일종의 왜곡된 복수로도 보인다.
바람은 다른 말로 외도外道라고도 부른다. 직역하면 다른 길, 길이 아닌 길로 빠졌다는 뜻이다. 만화가면서 만화를 그리지 않고 부인이 있으면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토시오의 마음은 말 그대로 길을 벗어나 방황 중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길을 잃고 헤매는 남편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이른바 현모양처의 남편 길들이기류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내인 사와코가 두 사람의 불륜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도 곧장 남편에게 화를 내거나 이혼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와코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지 않는 이유는 꼭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만은 아니다. 중요한 일들은 대개 복잡하다.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아직 남은 남편에 대한 사랑, 친정 엄마에 대한 미안함 등 단칼에 잘라버릴 수 없는 것들이 이리저리 얽혀있다. 그중에서도 사와코에게 가장 부담이 되는 것 중 하나는 다름 아닌 혼자되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다. 사와코는 차가 없으면 생활이 어려운 지방 출신인데도 운전 면허가 없어서 어딜 갈 때마다 남편이 데려다주어야 한다. 꼭 차를 운전하는 게 싫거나 불편해서가 아니라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와코는 운전 면허를 따지 않았다. 운전 학원에 등록하고 처음 강습을 받던 날 액셀을 밟으라는 강사의 말에도 도저히 브레이크에서 발을 뗄 수 없었던 이유는 자기가 운전을 할 수 있게 되면 남편이 자기를 떠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영화 <선생님, 내 옆에 앉아줄래요?>는 그래서 가정의 주도권을 가진 아내가 남편을 바로잡는 <이춘풍전> 식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영화 속에서 마음이 방황하는 사람은 남편인 토시오만이 아니다. 토시오가 주도권을 상실한 남자의 열등감에 갇혀 있다면 사와코는 뜻하지 않게 주도권을 얻게 된 여자의 불안감 속에 갇혀 있다. 사와코가 일찍부터 두 사람의 불륜을 눈치채고 있었으면서도 관계를 정리할 수 없었던 건 꼭 분명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과 자신의 관계가 치정의 삼각관계만이 아니라 스승과 편집자라는 의지의 삼각관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세 발로 서 있는 무언가에서 두 발을 치우면 어떻게 될까. 사와코는 그 무언가가 결코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발을 치우는 순간 그게 떨어져 깨져버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인해 지금까지 참아왔던 것이다.
영화는 토시오의 심리는 보여주지만 사와코의 심리는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이 관계를 결정할 힘이 사와코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관객은 토시오가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는 바로 알 수 있지만 사와코의 심리는 그녀가 그린 만화 콘티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래서 토시오의 심리는 관객에게 진실처럼 전달되는 반면 사와코의 심리는 이것이 진실인지 아니면 단순한 만화의 콘티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사와코가 관계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토시오가 느끼고 있는 기분은 바로 토시오와 치카의 불륜을 눈치챘을 때 사와코가 느끼고 있었던 그 기분과 같다. 배우자가 자신을 배신했을 때 느끼는 감정을 사와코는 만화를 통해 토시오가 느끼게끔 하고 있는 것이다.
관계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와코가 이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승을 추월했을 때 과연 사와코는 기쁘기만 했을까. 만화를 그릴 의욕을 잃고 편집자와 바람을 피우는 남편을 보면서 혹시 저 사람이 저렇게 망가지게 된 원인은 어쩌면 나에게도 일부 있지 않을까 라고 고민하지는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토시오는 그녀가 만화로 입문하게 해준 스승이었다. 스승과 편집자라는 이 세계에서 가장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두 사람이 자기를 배신했다는 생각은 아무리 성공한 만화가라고 해도 행복한 기분이 들지 않게 만든다. 열등감은 분명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그러나 고통은 토시오만 겪고 있었던 게 아닌 것이다.
영화는 열등감과 불안이라는 각자의 고통을 조금 낯설고 색다른 방식으로 풀어낸다. 특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한 사람의 이야기는 실사로 촬영하고 다른 한 사람의 이야기는 만화라는 방식을 통해 그리는 점은 독특하다. 토시오는 현실의 인물이지만 그의 말과 행동은 사와코가 그린 만화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액션이 아니라 리액션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만화가 액션을 취하고 현실이 리액션을 취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이건 아주 흥미로운 부분인데 왜냐하면 만화, 즉 가공의 이야기가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걸 넘어서 현실을 창작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한 때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나 김연수 작가가 말한 글쓰기와 치유라는 개념에 골몰했었다. 자기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두 작가지만 처음 소설을 쓸 때는 그게 미래에 대한 준비나 직업 훈련 같은 게 아니었다고 한다. 힘들고 피곤한 와중에도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건 그게 곧 치유와 재생이었기 때문이라고. 있을 법하지만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가공의 이야기를 쓰는 게 어려운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두 작가는 말했다. 이 말대로라면 사와코가 남편에게 이혼 통보를 하는 대신 만화를 그린 것은 꼭 남편을 불안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이 겪는 현실을 만화로 옮김으로써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자기가 느낀 감정들을 혼란 속에서 정돈하는 작업을 사와코는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직접 겪고 있을 때는 불안하고 혼란스럽기만 한 일도 책이나 만화로 보면 통제가 가능한 것처럼. 그리고 그건 사와코가 남편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사와코가 만화를 그리게 된 건 토시오라는 선생님이 옆에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운전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신타니라는 선생님이 옆에 앉았던 덕분이라는 점에서 그녀는 영화의 제목처럼 자신을 가르쳐 줄 수 있는 남자들에게 “선생님, 내 옆에 앉아줄래요?”라고 말하는, 타인의 도움 없이는 혼자서 어디론가 가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만화가가 된 후에도 토시오가 운전하는 차가 아니면 이동할 수 없었던 이전과 달리 사와코는 신타니에게 운전을 배운 후 운전석으로 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선생님, 내 옆에 앉아줄래요?”라고 말했던 건 꼭 누군가 운전석에 앉아서 자신을 데려다달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멀리까지 가기 위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옆에 있어주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와코는 타인을 동경했고 토시오는 질투했다. 결말에 드러난 두 사람의 다른 행보는 아마도 이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2025년 1월 21일부터 2025년 1월 2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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