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처럼 살고 있는 삶

by 윤재

61. 식물처럼 살고 있는 삶, 『랩걸』을 읽고



과학이란 단어는 종종 차갑고 객관적인 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과학을 삶의 시, 사랑, 투쟁으로 기록한 한 여성이 있습니다. 바로 호프 자런(Hope Jahren)이지요. 그녀의 회고록 『랩걸』은 단지 여성 과학자의 자전적인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뿌리를 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인간의 생애를, 그리고 조용히 자라나는 식물들의 언어를 통해 삶을 말하는 책으로 저와 연결되었습니다. 2017년 독서 모임에서 다루었던 이 책이 오늘 아침 빗소리를 들으며 생각이 났습니다. 전에는 듣지 못했던 단어, “극한 폭우”, “살인적인 폭염”! 과 더불어.



올여름, 서울은 물론 도쿄, 뉴욕, 두바이, 베이징까지 전 세계 대도시가 기이한 폭우에 휩싸였습니다. 장마는 끝이 났는지 다시 시작인지 알 수가 없고, 태풍은 비정상적인 경로로 몰려오며, 몇 시간 사이에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기는 광경이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이런 기상이변은 단순한 ‘날씨 뉴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경고음이며, 동시에 지구 생태계가 보내는 마지막 신호이기도 합니다.


『랩걸』에서 호프 자런은 식물을 관찰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식물은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얼마나 갑작스럽게 세상을 바꾸었는지를. “




랩걸 책 표지.png



식물은 기후에 민감합니다.

뿌리는 비의 흐름을 기억하고, 나이테는 온도의 미묘한 차이를 각인하게 합니다.

과학자인 호프 자런은 이 ‘자연의 기록장’을 해석하며, 인간이 어떻게 자연을 침범했는지, 그리고 그 침범이 어떤 비극을 낳을 수 있는지를 조용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는 과학자의 실험실 안에서만 측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것은 지하철역을 잠기게 하고, 고속도로를 끊어놓으며,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게 할 뿐만 아니라 귀중한 생명도 앗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급변은 식물뿐 아니라, 우리 인간의 삶에도 심각한 타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식물의 생애를 통해 인간 존재를 이야기했던 그 책이, 지금 이 거대한 자연의 반응 속에서도 묵직한 울림을 전하고 있습니다.



도시는 인류 문명의 집약체, 편리성과 접근성의 유용함을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기후 위기에 가장 취약한 공간이기도 하지요.
콘크리트로 덮인 땅은 빗물을 흡수하지 못하고, 잘못 설계된 배수 체계는 폭우에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도심의 열섬 효과는 폭염과 폭우를 동시에 부릅니다.

도시의 나무 하나를 살리기 위해 흙을 파고, 비료를 분석하고, 뿌리의 성장 방향을 고민하는 노력과 정성은 작지만, 지금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도시의 본질적 문제에 대한 또 다른 해답이기도 합니다. 인간 중심의 개발에서 생명 중심의 복원으로의 전환, 그것이 자런이 『랩걸』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또 다른 목소리일 수 있습니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과학을 선택한 것은 과학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의 집, 다시 말해 안전함을 느끼는 장소를 내게 제공해 준 것이 과학이었다. 성장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길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 p.33



”시간은 나, 내 나무에 대한 나의 눈, 그리고 내 나무가 자신을 보는 눈에 대한 나의 눈을 변화시켰다. 과학은 나에게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발견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과학은 또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중요한 것을 주의 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도 가르쳐줬다. “ p.49



“숲에 들어간 사람들은 대부분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높이로 자란 큰 나무들을 올려다볼 것이다. 그러나 발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드물다. 발자국 하나마다 수백 개의 씨앗이 살아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모두 그다지 가망은 없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절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기회를 기다린다. 그 씨앗 중 절반 이상은 모두 자기가 기다리던 신호가 오기 전에 죽고 말 것이고, 조건이 나쁜 해에는 모두 죽을 수도 있다. 이 모든 죽음은 이렇다 할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머리 위로 우뚝 솟은 자작나무 한 그루 당 매년 적어도 25만 개의 씨앗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제 숲에 가면 잊지 말자. 눈에 보이는 나무가 한 그루라면 땅속에서 언젠가는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기를 열망하며 기다리는 나무가 100그루 이상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p. 50~51



“ 선인장은 사막이 좋아서 사막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막이 선인장을 아직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사는 것이다. 사막에 사는 식물은 어떤 식물이란 사막에서 가지고 나오면 더 잘 자란다. 사막은 나쁜 동네와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거기서 사는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어서 거기서 사는 것이다”... p.203



“아들은 내가 아니다. 그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다. 그는 천성적으로 명랑하고 자신감이 넘치고, 자기 아빠의 안정감 있는 정서를 물려받았다. 초조해하고 일을 곱씹는 경향이 있는 나와는 많이 다르다. 아이는 세상을 경주용 차로 보고, 자기가 운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나는 늘 차에 깔리지 않는 데 초점을 맞추고 살아왔다. 아이는 자신에 대해 만족해하고, 그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적어도 아직까지는 ) 반면 나는 영원히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 갇혀 있을 것이다.”... p.365



“나와 아들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아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알아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 답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삶에서 뭔가를 이루어내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열심히 일해온 나로서는 정말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는데 귀중한 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경험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예전에는 나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했지만, 이제는 내가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내가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이제는 내 사랑이 아이가 이해하기에 너무 큰 건 아닐까 걱정한다.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알 필요가 있고, 나는 내가 느끼는 이 풍요로운 사랑을 모두 표현할 능력이 없어 무력감을 느낀다. 이제 나는 내 아들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렸던 기다림의 끝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아이는 불가능한 동시에 불가피했다는 것을 깨닫고, 누군가의 엄마가 될 단 한 번의 기회가 한 번 내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 p.366



“세상은 조용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p.399



“ 우주에서 본 지구는 해마다 조금씩 녹색이 줄어가고 있다. 컨디션이 나쁜 날이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 전 지구적인 문제들이 악화되고만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늘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 즉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자손들을 황폐한 폐허에 남겨두고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 지금까지 어느 때보다 더 병들고, 굶주리고, 전쟁에 시달리고, 심지어 녹색이 주는 소박한 위안마저도 박탈당한 채 사는 세상을 남기고 떠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컨디션이 좋은 날이면, 이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한 해에 나무 한 그루씩 심자!!!

마당이 있는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나무를 한 그루 심고 집주인이 눈치챘는지 기다려보자"..... “ p.400



“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결혼을 하는 것과 같다. 장식품이 아닌 동반자를 선택해야 한다. ”... p.401



호프 자런(Hope Jahren, 1969~ )은 미국 미네소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르치던 커뮤니티 칼리지의 실험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과학에 대한 흥미를 키웠다고 합니다. 그 작은 실험실은 그녀에게 '생각할 수 있는 장소', 즉 과학과 그녀 자신이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여성 과학자로서 호프 자런은 유리천장을 넘는 데 있어 여러 가지 장벽에 부딪혔습니다. 편견, 고립, 예산 부족, 성차별, 그리고 정신 건강의 어려움까지.

하지만 그녀는 결코 실험을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그녀는 묵묵히 ‘랩걸’로 살아가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녀의 실험실은 단지 연구의 공간이 아니라, 존재의 터전이었고, 동료와의 우정이 피어나는 장소였습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조지아 공과대학과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부교수로 재직하였고, 풀브라이트 상을 세 번 수상한 여성 과학자로, 2005년에는 젊고 뛰어난 지구물리학자에게 수여하는 제임스 매클웨인 메달을 받았습니다. 현재는 오슬로에 거주하면서 연구와 집필 활동을 병행 중입니다.



『랩걸』은 식물의 언어로 인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년기와 과학에 대한 첫사랑, 빌이라는 독특한 조력자와 함께한 연구의 여정, 그리고 그들의 과학 인생이 엮이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자신의 삶의 국면을 식물의 성장 단계와 교차시키며 풀어낸다는 것이지요.



호프 자런은 실험의 디테일을 묘사하면서도, 이를 시처럼 아름답게 풀어내었습니다. 그녀는 식물의 성장 과정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상황을 은유하여 전달합니다. 이를테면 나무가 바람과 태풍을 견디며 강해지듯, 사람도 고통을 통해 단단해진다는 것처럼요. 이런 서정성 덕분에 과학에 문외한인 저도 이 책을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노을 진 하늘만큼 기품 있는 그림은 없다.

노을을 보기 위해서는 그 누구와 만날 필요가 없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생생히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정신은 인간사회로부터 멀어진다.

자신과 물질과의 관계, 또 자신의 영혼과 육체와의 관계를 알고 싶으면 산에 올라야 한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나무가 싹터 크고 가지 치는 데서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나무는 자체의 힘과 이십사절기와 사계절의 리듬을 타고 커 가는데, 사람들은 억지와 경쟁으로 자신과 이웃, 줄기까지도 갉어 먹으면서 크려고 하니까 일이 뒤틀리는 게 아닌가 싶어요.

씨의 공통점은 작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뿌리고 묻기 쉬우며 땅에도 별 부담감을 주지 않습니다. 나무도 어린 묘목을 심어야 많이 심고 살기도 잘 삽니다.

큰 나무는 옮기기도, 심기도 힘들고, 살리기도 힘듭니다.

옮겨 심은 큰 나무는 몇 해 몸살을 앓다가 겨우 살아나거나 말라죽기 일쑤입니다.

........ 씨가 땅에 묻혀 싹을 틔우듯, 사람의 인격과 삶의 일부도 딴 사람에게 묻혀야 한다고 여깁니다 "....... 전우익 <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 중에서




『랩걸』은 단지 한 과학자의 삶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구의 일기장이며, 식물의 언어로 쓰인 경고문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듣지 않는 자연의 목소리를 자런은 과학으로, 문학으로 번역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서로 기대어 살아간다. 식물은 햇빛에 기대고, 인간은 식물에 기댄다. “


지금, 우리는 그 균형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날, 나는 자런이 들여다본 그 뿌리의 세계를 생각합니다.

땅 아래에서, 식물은 여전히 우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그 기록이 부끄럽지 않도록, 너무 늦지 않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또 호프 자런, 그녀는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 늦게 심은 씨앗은 없다."고요.

그 말처럼, 독자인 저도 나만의 작은 실험실과 뿌리를 꿈꾸며 오늘을 살아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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