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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낙원에 흐르는 시간

by 윤재



천국이 꼭 하늘에만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파페에테의 아침은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이곳의 시간은 땅 위에서 흐르고 있습니다. 누구도 서두르지 않고, 누구도 시간을 쫓지 않습니다. 시계는 손목이 아니라 바람과 파도에 달려 있고, 그 흐름을 받아들이는 순간 남태평양의 낙원이라고 불리는 현장에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오늘은 남태평양의 낙원이라고 불리며 전 세계에서 찾아온 여행객들로 붐비는 타히티의 수도 파페에테(Papeete)에 도착했습니다. 파페에테는 큰 항구도 보유하고 있어 남태평양 해상의 주요 거점으로 무역과 운송의 중심지입니다. 도심의 규모가 크지 않아 도보로 다닐만합니다만 뜨거운 햇볕과 무더위가 방해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높은 산과 깊은 계곡, 맑은 강과 폭포, 아름다운 꽃들이 있는 꿈같은 휴양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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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히티 제도로 알려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장엄한 화산봉우리와 태평양을 꽉 채운듯한 산호섬, 거대한 에메랄드빛 라군으로 구성된 118개의 섬이 넓은 면적 위에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섬으로는 타히티, 보라보라, 후아히네, 무레아 등의 섬이 대표적입니다.


타히티가 아름다운 자연환경 때문에 ‘낙원’으로 불리는 것은 타히티에서 1시간 정도 비행기로 더 가야 하는 세계적인 휴양지인 보라보라섬 때문이기도 합니다. 타히티는 크고 작은 두 섬이 지협으로 연결되어 조롱박 모양을 하고 있는 섬입니다. 큰 섬이 타히티 누이, 작은 것이 타히티 이티로 불립니다. 면적은 세종특별자치시의 2.2배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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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보는 각도에 따라, 수심에 따라 유리처럼 투명한 옅은 녹색에서부터 초록색, 짙은 푸른색까지 다양한 살결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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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도착하자 부두에 현지인들이 연주하는 타히티안 환영의 연주도 둥둥 쿵쿵♪♬ 가슴에 와닿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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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히티 거리를 걷다 보면 4~5명이 우쿨렐레와 기타 그리고 북을 연주합니다. 경쾌하고 흥겨워 그 음악에 맞춰 들썩 들썩 춤을 추고 싶게 만듭니다. 폴리네시아의 북은 나무줄기의 크고 둥근 부분을 파서 비우고, 상어나 염소의 가죽을 말리고 늘려 양쪽 나무 둥치 끝에 씌워 고정시킵니다. 의식에서 춤과 노래를 위해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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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타히티 관광청



배에서 진행하는 우쿨렐레 강사가 바뀌어 7월 초부터 ‘폴리네시안 명예 홍보대사’인 투이 Tui가 진행합니다. 체격도 좋고 재즈 싱어 닐 암스트롱을 연상하게 하는 목소리로 노래를 그야말로 구수하게 부릅니다. 그의 아내 마일리 Maile는 훌라춤 공연과 강습을 진행하는데 많은 여성 승객들이 훌라춤 배우느라 열성입니다.
















사진 출처: Tui & Maile 홈 페이지



그들과 함께 했던 즐거운 시간이 그립습니다.

A Hui Hou~ until we meet again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타히티의 인구는 약 18만 명 정도이고, 폴리네시아계 원주민이 75% 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언어는 프랑스어와 타히티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배에서 내려 천천히 투명한 햇빛 아래 해안가 도로를 산책하듯 타히티를 만나러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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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태평양의 여러 섬을 전화로 몰아넣은 전쟁은 종식됐지만, 태평양 핵 수난사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냉전 시대로 접어들며 강대국의 핵 개발 경쟁이 벌어지면서 태평양이 미국과 프랑스, 영국의 주요 핵실험장이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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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실험 기념지, Memorial Site for Nuclear Testings



이 기념지는 낙진이나 기타 방사선에 노출되었을 수 있는 많은 섬 주민들을 기리기 위해 시내와 해안가 근처에 위치해 있습니다. 기념관 자체에는 그다지 많은 것이 없지만 지역 주민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핵실험 기념지는 부두에서 나와 산책로를 걷다 보면 바로 보입니다.


프랑스는 알제리에서 핵무기 프로그램을 시작했으나, 알제리가 독립하자 핵실험 센터를 남태평양의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로 이전했습니다. 1966년부터 1996년 사이에 프랑스는 모 루로아(Moruroa)와 팡가타우파(Fangataufa) 환초에 193 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했습니다. 수년 동안 프랑스 당국은 핵실험으로 인한 부작용에 대한 주장을 부인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후 테스트 연구에 따르면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인들은 갑상선암 발병률이 높고 방사성 동위원소가 해양 환경으로 유출되었으며 환초의 심각한 균열로 인해 수중 산사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수천 명의 전직 시험장 작업자와 태평양 지역 주민들은 이러한 무기에 대한 기억을 갖고 살아가고 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들의 건강과 환경에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주민 피해를 막을 대책도 없이 핵실험을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남태평양 지역을 공식 방문한 자리에서 프랑스가 이 지역에서 실시한 핵실험으로 ‘빚을 졌다’고 인정했지만 주민들에 대한 공식 사과와 구체적인 보상책 발표는 없었습니다. 핵실험 피해자 모임의 대표자가 마크롱대통령과의 면담 자리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시급한 요구가 있다면서 프랑스 정부의 실질적인 지원과 진정한 사과를 요구했으나 원론적인 답변만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와 일본의 관계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고 안타까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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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의 Two Tahitian women 패러디, 사진 출처 Opposition to French Nucler Testing 1960s-9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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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도 강렬합니다




마라에 Marae는 고대 폴리네시아인들이 신을 숭배했던, 종교의식에 사용된 야외 사원입니다. 고대 폴리네시아인들의 생활은 종교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사회적, 정치적, 가족 모임은 마라에(marae)라고 불리는 성역 안팎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다양한 석조물과 높은 제단으로 꾸며져 있고, 직사각형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신과 조상의 영혼을 위해 마련된 2단 아후(ahu, 제단)가 끝에 있는 평평한 플랫폼이 있으며, 사회적 지위와 재산권, 씨족의 지위 등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고대 건축물은 많지 않습니다.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이 공간에서 종교의식, 결혼식 및 승전식을 올렸고 신성한 존재에게 음식을 공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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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aurahu Marae: 아라 후라오 마라에 사원



아라 후라오 마라에 사원은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잔디와 석조건축물이 늘어서 있어 공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선교사들이 왔을 때 수많은 의식 장소와 동상, 성상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 장소는 타히티 사람들의 신성한 문화를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유적 중 하나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해 보입니다.


아라 후라 후 마라에는 1953년에 복원된 고고학 유적지로, 방문객들은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 폴리네시아인들의 조상 종교인 마오히의 문화, 특히 그들의 문화 일부를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마래에는 전형적인 고대 문화 센터입니다. 타후아(신성한 안뜰), 파투(주변 벽), 아후(제단), 타우라(수호신)를 위한 붉은 우누(조각된 나무 조각) 등 여러 특정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체 사원과 부지는 잘 관리되고 깨끗하며 여전히 현지인들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조각상은 웅장하며 이스터섬의 모아이석상, 우리나라 제주의 돌하르방 등을 연상하게 합니다. 넓은 제단 지역은 뒤쪽에 벽이 있는 수천 개의 검은 용암 바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입구 근처에 있는 두 개의 석상은 박물관에 있는 원본을 복제한 것입니다. 폴리네시아 전역의 삶은 한때 의식의 힘으로 정의되었습니다. 많은 곳에서 추장은 너무 신성해서 실제로 볼 수 없었고, 추장을 매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면 9개월 이상 손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검은 돌로 만든 신성한 구조물인 '아라 후라 후 마라에(Ārahurahu Marae)는 오로지 의식을 위해 지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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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들의 휴양지로 개발된 파페에테는 부두에서부터 길게 조성된 해안 산책로가 여행객들의 발길을 재촉합니다. 타히티의 부엌과도 같은 활기 넘치는 중앙 시장에는 많은 상인들이 신선한 농산물과 생선, 고기, 수공예품과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티아레 타히티로 만든 화려한 꽃다발과 화환을 판매하는 가판대도 있습니다. 시장 2층에는 파페에테 특산물인 흑진주를 판매하는 상점들이 활발하게 영업을 하고 있고 간식과 커피를 파는 스낵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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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레 타히티 꽃은 청아함과 행복을 상징하는 타히티의 국화로,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향기를 한 번 맡아보면 영국 작가 서머싯 몸(Samert Mumn)이 "한 번 이 꽃의 향기를 맡은 사람은 언젠가 다시 타히티로 돌아온다"라고 한 말도 이해가 됩니다. 우리도 다시 타히티로 돌아갈 수 있겠지요. 현지인들로 붐비는 시장과 남국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성당 등 거리를 산책하면서 듣게 되는 프랑스어가 매력적인 노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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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크루즈를 계획할 때 마음을 설레게 한 곳은 타히티와 저의 <제3의 공간>을 즐길 수 있는 미술관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번 크루즈는 제게 있어 그림과 함께 하는 여행이 되었습니다.

타히티를 생각할 때 맨 처음에 떠오른 것은 폴 고갱이었습니다.



청소년 시기에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를 읽었지만, 크루즈 여행을 앞두고 <달과 6펜스>를 다시 읽었습니다. 소설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틀에 박힌 생활의 궤도에 편안하게 정착하는 마흔일곱의 나이에,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출발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요즘같이 변화와 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지는 상황이라면 어쩌면 조기 명예퇴직을 해야 하는 나이 마흔일곱에 주인공은 변화를 시도하는군요. ”우리는 나란히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 이 문장은 <달과 6펜스>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어린 시절에 읽었을 때는 늦은 나이에도 자신의 열망을 찾아 과감하게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최근에 읽었을 때는, 갑작스럽게 가정과 직장에서 벗어나 화가로서의 삶을 위해 파리로 가는 행동이 이기적으로도 다가왔고 소통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을까, 책임감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부인의 이해와 지지를 받고 그림과 함께 하는 인생의 2 모작을 주인공이 준비했더라면 괴팍스러운 성격 묘사가 좀 더 부드럽고 원만한 성격이 되지 않았을까요.


”남편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구설수가 무서워서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부인의 상심 가운데에는 버림받아 괴로워하는 마음과 자존심을 상해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이 – 내 젊은 마음에는 그런 자존심이 야비하게 여겨졌다 – 뒤섞여 있지 않나 해서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몰랐다 “.... p.55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 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p. 67


소설에서 ’ 달‘은 고갱이 그토록 갈망한 아름다운 이상, ’ 6펜스‘는 척박하고 세속적인 현실을 상징합니다. 소설 주인공의 모델은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 1848 ~ 1903)입니다.


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린 초기 작품인 <언제 결혼하니?, 1892>는 햇빛에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의 두 여성이 캔버스 중앙에 크게 자리하고 뒷 배경은 타히티의 풍광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화체 질문을 제목으로 정한 이 그림은 단순하고 투박한 묘사와 노란색, 빨간색 등 대담하고 화려한 색채, 그리고 타히티 전통 옷차림과 평온한 배경으로 다가옵니다. 생전에 좋은 평가는 받지는 못했으나 이 그림은 당시까지 최고의 그림인 폴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을 갱신하여 2015년 경매에서 가장 비싼 그림(우리 돈 2,400억 원가량, 인류 역사상 4번 째로 높은 가격으로 거래된 작품)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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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언제 결혼하니?>, 1892, 개인 소장



폴 고갱은 1891년 6월, 타히티를 순수한 낙원으로 기대하고 긴 항해를 거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유럽 문명에서 벗어난 소박하고 신비로운 삶을 기대했지만, 타히티는 그의 예상과는 달랐지요. 파페에테에서 몇 개월을 보낸 뒤 원주민들만 살고 있는 조용한 섬으로 옮겨갔습니다. 그곳에서 원주민들의 일상을 열대 지방의 색으로 캔버스에 옮겨 담기 시작했지요.


”예술은 표절이거나 혁명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한 고갱은 타히티에서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의 일부는 사진작가의 작품과 인물의 배치, 구도 등이 유사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습니다. ”밖에서 본 것을 작업실에 와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것을 상상력으로 그렸다. 완전한 자유로, 의미 없는 소소한 디테일을 제거하고 나의 색으로 표현했다 “고 고갱은 말했습니다.


미술은 자연의 재현이 아니라 추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원근을 무시한 구도와 단순화된 형태, 강렬한 색채 등 고갱의 작품은 현대 미술 발전의 주요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파블로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들의 작품에서 고갱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의 짧고 강렬한 만남과 우정은 최근까지도 많은 회자되고 있지요. 둘은 1887년 파리에서 만났고 예술에 대한 사랑이 강렬했기 때문에 빠르게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반 고흐는 고갱의 대담한 색상과 구성에 매료되었고, 고갱은 반 고흐의 강렬한 감정과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표현에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의 합류는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열정적이고 충동적인 반 고흐에 비해 냉정하고 내성적인 고갱은 평면적인 붓 터치를 선호했습니다. 둘의 열띤 논쟁 이후 자신의 귀를 자른 반 고흐를 떠난 고갱은 이후 다시 서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평탄하지 않은 우정이 기존 예술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소외감이라는 연결 고리를 끊어버린 것이겠지요.



폴 고갱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이자 현대 회화의 포문을 연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고귀한 야만인’, ‘서구 문명의 이단아’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1889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를 본 뒤, 처음 접한 동남아시아와 일본, 태평양의 독특한 문화들에 충격을 받고 다시 한번 유럽을 벗어날 생각을 갖게 된 그는 이번엔 남태평양의 외딴섬 타히티를 선택했습니다. 프랑스의 마르세이유항에서 파페에테까지 항해하는 데 63일이 걸렸습니다. 고갱은 타히티야말로 자신의 예술에 필요한 순수한 원시의 땅이라고 기대를 하게 되어 타히티로 향했으나 이미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며 문명화가 진행되었고, 원주민들과의 낭만적인 교류는 기대와 달리 냉담했습니다. 타히티에서 2년을 머물며 그림을 그려 파리로 갔지만 여전히 대중들의 평가는 기대와 달랐습니다.


다시 타히티를 찾은 고갱은 타히티보다 더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는 마르퀴즈 제도의 히바 오아 섬으로 거처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근대성에 좌절하고, 프랑스 식민 당국과 다툼을 벌이고,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급격한 쇠퇴를 겪었다. 개인적 어려움이 고조되던 시기에, 고갱은 이 기념비적인 그림에서 삶의 본질과 의미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탐구했습니다. 이 기념비적인 그림은 그가 시도한 것 중 최대 규모였으며, 이는 의심할 바 없이 그의 예술적 유산을 염두에 둔 야심 찬 노력이었습니다.


그의 작품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는 고갱의 실질적인 마지막 작품은 아니지만 그 스스로 유작이길 바랐던 작품입니다. 자신이 버린 가족 중 가장 아끼고 보고 싶어 했던 본처 소생의 외동딸인 알린의 사망소식을 듣고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되며 이 시기에 자살 시도를 합니다. 스케치와 습작을 생략한 채 마지막 모든 힘을 다해 거대한 작품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 그림에서 고갱은 인간의 탄생과 삶, 죽음에 이르는 세 단계를 폴리네시아 토속 신앙과 더불어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오른쪽 갓난아기를 통해 탄생을, 중앙에서 과일을 따는 젊은이는 현재를, 왼쪽 웅크리고 앉아 괴로워하는 노인은 우리의 미래를 나타내고자 하였습니다. 아끼던 딸을 토속 신앙의 힘을 빌려서라도 달의 여신 옆에서 영원히 살았으면 하는 고갱의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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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

보스턴 미술관



고갱은 이 그림을 파리에서 전시할 당시에 황금빛의 휘황찬란한 프레임을 씌웠는데, 이는 자신의 작품이 르네상스의 거장에 견줄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의 작품이 현대 회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가 동경하던 원시 세계와 이국적인 문명에 대한 탐구는 피카소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1917년 영국 작가 서머싯 몸은 고갱의 발자취를 따라 타히티를 직접 방문하여 소설을 1921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고갱의 작품이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사생활과 별도로 자신의 상상이나 신화들을 그림 속에 투영하고, 전통적인 원근법, 빛의 묘사 등에서 과감히 벗어난 고갱.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중에 에두아르드 들뤽(Edouard Deluc)이 감독하고, 뱅상 카셀(Vincent Cassel)이 주연한 영화 <타히티의 고갱, 원 제목은 Gauguin: Voyage to Tahiti>은 1891년부터 1893년까지의 고갱의 타히티 시절을 담았습니다. 들뤽 감독은 고갱이 새로운 화풍을 찾아 나서는 의지보다 로맨스와 타히티 풍광에 더 몰입한 듯 구성하여 영화는 부정적인 평가를 접하기도 했습니다.


당사자가 충실하게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타인이 누군가의 생애를 온전히 이해하면서 영상에 아름답게 담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갱의 엄마가 페루계였고, 어린 고갱은 어머니와 페루의 리마에서 6세까지 살았습니다. 페루의 잉카 문명은 고갱에겐 그리움이며 이상향일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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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의 무덤, 사진 출처: Atuona Cemetery





폴 고갱의 삶과 그의 그림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다시 보며 문태준 시인의 한 호흡 시어들이 떠오릅니다.


한 호흡


문태준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 내고

피어난 꽃을 한 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 버리려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 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 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 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의 탄생과 소멸을 ‘ 한 호흡’이라 부르자는 문태준 시인.

들숨과 날숨이 한 번씩 오간 것을 한 호흡이라고 할진대, 짧은 시간이지요.

시인은 아버지의 홍역 같은 고단한 삶에서 죽음까지의 시간을 한 호흡이라고 봤습니다.

호흡 한 번이 참 길지요. 살아가다 보면 밭은 호흡, 긴 호흡, 참을 수 없는 호흡 그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지금은 어떠한지, 앞으로는 어떠할지 잠시 숨을 고르고 돌아봐야겠습니다.

시인은 꽃을 통해 우리 삶의 마디마디를 긴 호흡으로 돌아보며 묵묵히 살아가는 힘을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 같습니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 1954)는 바닷가로 여행을 가면 잠수를 즐겨했고, 물속에서 숨을 참고 하늘을 바라보곤 했는데, 그럴 때 눈앞에는 물고기가 보이고 해수면 위로는 새들이 보였습니다. 노년의 마티스는 수술을 여러 번 받았고, 관절염과 각종 지병이 있었고 심지어 위하수증으로 벨트를 차고 있어야 해서 오래 서 있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관절염으로 손가락을 사용하기가 어렵고, 시력의 문제로 유화 그림을 그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색종이 작업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타히티의 파카라바섬에서 산호초 사이를 자유롭게 수영하며 돌아다닌 시간을 기억하고 종이에 불투명 수채화(과슈)를 칠하고 그 위에 색종이를 오리며 붙이는 '컷아웃'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폴리네시아 연작을 하기 위해 300마리가 넘는 새를 키우며 관찰했다고 합니다. 새와 물고기를 단순하면서 생동감, 율동감 있게 표현하기 위해 수없이 노력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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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마티스, 새를 관찰하며 드로잉 하는 중, 사진 출처: MoMA





앙리 마티스, <폴리네시아 하늘>, 1946, 퐁피두센터










앙리 마티스 < 폴리네시아 바다>, 1946, 퐁피두센터



고갱의 바다, 마티스의 바다, 다시 그 바다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저녁은 폴리네시안 음식을 먹고, 저녁 후 7시에 폴리네시안 민속 무용을 극장에서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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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타히티 관광청


오리 타히티라 불리는 타히티 춤은 폴리네시아 정신을 생동감 있고 감각적이며 흥미롭게 표현합니다. 춤의 동작들을 통해 감정과 이야기를 전하고, 세대 간 전통을 계승한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신에게 바치는 의식이나 결혼식, 출산 등 중요 행사 때 공연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관능적인 움직임, 격렬한 리듬 등 오리 타히티의 독특한 전통 예술이 격정적입니다.




초기 개신교와 가톨릭 선교사들은 오리 타히티가 너무 관능적이라는 이유로 춤을 금지시켰던 적이 있었답니다.



파피에테의 하루가 저뭅니다. 내일은 무레아섬에 기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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