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어당김’이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 최우선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것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또 다른 것은 전혀 응답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 아닌가. 과거를 회상하는 글을 쓰던 중 타자 치던 손을 멈추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전문 과외 선생과 노점 샌드위치 사장 사이의 가장 큰 차이가 무얼까. 둘 다 고민하는 시간을 줄여 실행했고 뛰어든 이상 최선을 다했다는 기본값을 설정한 뒤 출력 버튼을 눌렀으나 결과는 사뭇 달랐다.
첫째 간절함이다.
과외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 아빠의 사업 부도로 우리 집은 빚잔치 중이었다. 평생 시집살이를 감내한 엄마가 이제는 빚을 갚기 위해 밖으로 나가 공장을 돌고 도는 게 가슴 아팠다. 당시에 내 아킬레스건은 엄마였다. 엄마를 고통에서 구원할 대상은 나 하나밖에 없다고 여겼다. 아빠와 할머니마저 적으로 간주하고 화구를 겨눴던 시기도 모두 이때였다. 사업을 벌이는 족족 망하는 아빠가 원망스러웠고 뒷감당은 엄마에게 전가한다고 생각했다. 시어머니라는 위치에 있는 것만으로도 할머니를 미워했다. 내가 바라는 소망은 극명했고 소망의 수혜자는 엄마만을 향해있었다.
눈 뜨면 돈 벌 궁리했던 내게 강남은 추수를 앞둔 황금 들녘이었다. 내게 돈을 빌려달라는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했던 사람은 늘 엄마였는데 어느 날 돈이 똑 떨어져 당장 드릴 수 없던 날이 있었다. 마침 과외비를 받는 날이었다. 그런데 학부모가 여행 가고 없는 것이 아닌가. 과외비를 받아 엄마께 드려야 하는데 난감했다. 그런데 과외가 끝날 때쯤 학생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학생에게 전화를 걸어 무언가 지시하는 모양이 학부모이신 것 같았다. 학생은 거실로 나가 크고 깊은, 청자인지 백자인지 모를 항아리에 손을 깊숙이 넣더니 잡히는 대로 지폐 다발을 꺼냈다. 그러더니 세지도 않고 봉투에 넣어 내게 내미는 게 아닌가.
“선생님, 엄마께서 과외비 챙겨드리래요.”
얼핏 보기에도 과외비보다 훨씬 많은 액수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봉투를 열어보았다. 세 배가 넘는 돈이 들어있었다. 학부모께 전화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거실에 있는 도자기에 손을 쑥 넣었는데 거기 돈뭉치가 있더라. 그 돈을 세지도 않고 대충 봉투에 넣어 주는데 결단코 내가 과외비를 속인 것이 아니다.
“선생님 덕분에 성적도 많이 오르고 해서 이 기회에 더 챙겨드리려 했었어요. 마침 제가 집을 비워서 아이에게 넉넉하게 드리라 했는데 아예 세보지도 않고 드린 거예요? 아유, 죄송해요, 선생님.”
당장 필요했던 돈은 무리 없이 구해졌고 그 후에도 신기할 만치 엄마가 부탁하는 족족 필요한 만큼의 돈은 채워지곤 했다. 간절함이 자신을 향해도 끌어당김은 반응한다. 그러나 나의 경험상 타인을 위한 간절함에 좀 더 빠른 답이 돌아왔다.
둘째 진심이다.
샌드위치 장사를 하겠다고 술자리에서 선언했던 시간으로 거슬러 가보자. 과외를 때려치우는 것이 타당하다 내세웠던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정신적 고통이었다. 남의 집에 신발 벗고 들어가는 기분이랄지, 평생 흙길만 걸었던 내가 대리석으로 마감한 거실을 매번 주눅 든 자세로 가로질렀다든지, 일 년이면 총 네 번 치르는 시험 때마다 실력을 평가받는 압박감이랄지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주는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 열거했다. 이젠 육체적인 노동, 땀의 가치를 실현하며 살고 싶다고 주절거렸다. 그러나 몸이 힘들어도 좋으니 이젠 땀을 흘리고 싶다는 내 말 어디에도 진심은 없었다. 한시도 원한 적이 없던 꿈이 우발적으로 튀어나온 게다. 가끔 우리는 핑계와 소망을 혼동한다.
다행히 ‘주파수’는 섬세하다. 고유의 파장을 제대로 맞출 때 신호를 보낼 수 있고 그 주파수를 다른 방향으로 틀지 않아야 돌아온다. ‘주파수를 맞춘다.’, ‘신호를 보낸다.’ 여기에는 시간의 차라는 함정이 숨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이 ‘시간의 차’를 견디지 못한다. 즉각적으로 결과물이 나타나지 않으면 말도 안 되는 것에 시간 낭비했다며 돌아서기 일쑤다. 95.9 MHz를 맞추려다 89.1 MHz가 잡히면 그걸 원했던 양 듣기까지 한다. 수시로 바뀌는 목표는 간절한 상상이 아닌, 그저 상상 연습에 그친다.
시간의 차를 기다리기 위해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즉각적인 결과물이 드러나지 않아도 인내하며 과정을 즐길 수 있다. ‘신호’를 보내고 ‘신호’로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을 어떤 마음으로 채우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기에 오직 장마 때문에 한국식 서브웨이 CEO의 탄생(길거리 샌드위치 사장의 성공신화)이 물 건너간 것은 아니었다는 걸 이제 막 깨달아 버렸다.
아이들이 자석 구슬로 의자 뒷면을 장식했다. 두 녀석의 개성과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가 끌어들이는 모양 그대로 하루의 그림을 펼쳐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