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집 밖을 나서고 돌아올 때까지, 내가 마주하고 스치는 사람들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오직 나를 위해, 나 하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이고 있다는 상상. 내가 먹고, 자고, 이동하고, 생활하는 것에 불편함이 없도록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민첩하게 자기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이라는, 세상이 나를 위해 역동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상상 말이다. 그 유아적 상상이 자연스레 벗겨지는 나이가 지난 후에도 종종 그 ‘터무니없음’의 감각으로 돌아갈 때가 있다. 한 사람의 하루가 무탈히 흐르는 것이 되려 터무니없이 느껴지는 근래에 들어선 더더욱.
일상이 무참히 와해되는 어제오늘의 사건들 속에서 고민은 깊어지고, 현재 다다라있는 결론은 이것이다. 아무래도, 당신들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나 역시 당신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은 서로의 일상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한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5천1백7십5만 명의 일상을 뒤흔들 수 있고, 한 사람의 억울함을 위해 여러 세대가 함께 분노할 수 있으며, 한 사람의 용기로 전 세계가 뜨거워질 수도 있는 까닭이다.
이토록 당신들의 하루와 나의 하루가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은 내게 든든한 것이었다가, 곧이 내 시야를, 희망을, 숨통을 얄팍하게 짓누르는 것이 된다. 연결감은 기대감으로, 기대감은 작은 불통을 거쳐 실망으로 이어져, 나는 꽤나 오랜 시간 세상 일에 초연한 척, 무심한 척 지내야 했다. 따갑고 한기 어린 초겨울의 기억 한 조각 때문에.
몇 미터 간격으로 경찰들이 서서 통제하던 도로 위, 커다란 깃발들이 형형색색으로 날리고, 그 아래에 나는 ‘민중들’과 줄을 맞춰 걸었다. 평소엔 차량들로 꽉 차 있던 서울 한복판의 차도를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두 다리로 걷는 것은 사실 신나는 경험이었다. 뉴스에서나 봤던 ‘집회’라는 것을 성인이 되고 처음 해보는 것이었으니 더욱 들떴는지도 모른다. 대낮부터 저녁까지, 대학로에서 광화문까지, 학교 동문들부터 농민들까지, 그것은 내가 속해본 무리 중 가장 커다랗고, 가장 시끄럽고, 가장 뜨거운 것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출발해 모인 이들이 여러 갈래의 줄기를 이루다가 마침내 종로에서 하나의 거대한 기둥이 되었을 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무서웠다. 겁이 없는 나인데도 그랬다. 아마, 우리의 구호가 점점 거세어지기 시작했을 때, “더 정치적”인 것이 되었을 때 이미 나는 떨고 있었는지 모른다. 바리케이드로 통제된 도로 반대편에서 손가락질하고 욕을 퍼붓는 할아버지를 봤을 때까지만 해도 코웃음을 쳤는데 말이다.
실체 없던 공포는 곧 차갑고 따가운 현실이 됐다. 차벽이 들어섰고, 군데군데 우왕좌왕한 무리들이 보였고, 우리는 우비를 나눠 입었다. 살수차에서 쏘아진 물줄기는 얼마나 거센지 아주 멀리까지 나아갔다. 큰 물줄기 바깥으로 튀겨져 나오는 게 겨우 몇 방울일지라도 살갗에 닿으니 피부가 벗겨지는 것만 같았다. 그냥 물대포가 아니라 캡사이신이 들어간 최루액이니 맞지 않게 조심하라는 외침이 들렸다. 차벽 기준, 대열에서 꽤나 먼 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음에도 무작위로 뿌려대는 물대포에 나 또한 흠뻑 젖었고 눈을 뜰 수 없어 괴로웠다. 민중들이 생수병을 나눠줬다. 그날 그곳에서 처음 본 사람들. 그들이 내 눈을 씻겨 주었고, 나도 그들의 얼굴에 열심히 생수를 부어주었다. 꼴딱 젖은 채로 밤은 어둡고 날이 추워지자 ‘너희는 이제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당시 20대 초반, 대학생이었던 나는 다행스럽게도 ‘너희’였다. 나는 안도했다. 이미 춥고 따가웠지만 집에 갈 수 있었으니까.
광화문역 화장실에서 우비를 벗어 버리고, 눈을 오래 씻었다. 비비면 더 아프대서 손은 대지 않고 물로만 조심조심 씻었다. 그날 하필 왜 스키니진을 입고 나갔는지, 캡사이신을 머금은 청바지가 딱 달라붙어 다리가 불에 타는 것만 같았다. ‘조금만 참자. 참고 얼른 집에 가서 씻자’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지하철을 탔는데 이상하리만치 평화로웠다. 여느 주말과 같이 단란한 일상을 보낸 평범한 시민들의 모습. 한 가족은 놀이공원에 다녀왔는지 아이들이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들뜬 얼굴이었다. 나는 물에 젖은 생쥐꼴인데. 나는 그게 너무 이상하고 억울했던 것 같다. ‘여보세요, 사람들! 지금 당신들 머리 위에선 경찰이 시민에게 최루액을 뿌려대고 있다니까요? 이대로는 못 살겠다고, 뭐라도 바꿔보자고 전국 각지에서 10만 명이 모였다니까요, 글쎄?’
온몸이 따갑고 옷은 다 젖어서 자리가 나도 앉지 못했다. 그 지하철 칸에서 나는, 마치 초대받지 못한 파티에 눈치 없이 낀 사람처럼 쭈뼛쭈뼛 서있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포털 뉴스와 SNS에 쏟아지는 집회에 대한 기사들, 댓글들에 마음 어딘가도 따가웠다. 서러웠고, 외로웠다. 한순간에 몰려드는 수치심. ‘유난스럽다, 불편을 일으킨다, 불법적이다, 폭도다…’ 사람들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만 같았다. 내 생에 가장 커다란 무리에서, 가장 커다란 목소리로 희망을 외쳤던 날, 나는 가장 작게 쪼그라들었다.
2015년 11월 14일 1차 민중총궐기. 그날은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 집회가 되었다. 그날 일로 오래 앓았고, 상처의 자리에는 냉소가 딱지로 앉았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에 품었던 정의, 희망, 연대 같은 것들이 차갑게 배반당하고 따갑게 쏘아붙여졌기 때문이다. 다 같은 ‘동료 시민’이 아니라 ‘네 편’ 아니면 ‘내 편’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상만사와 무관하게 지냈다. 오직 나와, 몇몇 내 사람들만이 내 세상이었다. ‘그래, 어쩌면 이기적인 것이 가장 이타적인 것이야’ 한동안 그렇게 믿었고, 그런 삶도 나쁘지 않았다. 2016년 촛불집회도, 근래의 전례 없던 응원봉 집회까지도, 겉으로는 지지했지만 맘 속 깊은 곳에선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연대의 가치는 소중하게 생각할지언정, 연대의 실체는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으니까. 나의 그것은 2015년 광화문에 내팽개 쳐졌으니까.
그러다가 작년 12월 21일, 트랙터를 타고 상경 투쟁을 하는 농민들을 돕기 위해 남태령으로 달려간 사람들의 소식을 접했다. 신고된 집회가 경찰의 차벽으로 가로막히자, 늦은 밤인데도 택시를 탄 시민들이, 따뜻한 난방이 되는 버스가, 음식들이 남태령에 도착했다. 농사일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삼십 대 여성들이 응원봉을 들고 경찰에 대고 차를 빼라는 구호를 외쳐대고 있었다. 그곳에서 농민들은 한걸음에 달려와준 고마운 시민들을 ‘동지’라고 불렀다고 했다. 트랙터를 타고 온 전국농민연합은 시민들의 연대에 힘입어 장시간 대치 끝에 차벽을 넘어 서울에 진입할 수 있었다. 남태령에서 용산까지, 장장 28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날 조선일보 1면엔 “부활하는 불법시위”라는 헤드라인의 기사가 실렸다. 어김없이.
가슴이 뜨거워지는 소식. 나는 또 한 번 무언가를 믿어보고 싶어지는 기분에 휩싸였다. 용기로, 사랑으로 사람이 아름다울 수 있는 그 희박한 가능성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 믿음이 다시금 배반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속절없이 이끌림을 어찌할까. 희망이란 어쩌면 술처럼 취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통은 마비시키고 무모하게 만드는, 그래서 미친 척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취기. 불취불귀(不醉不歸). 취하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다. 취해야만 원래대로 살 수 있다. 말의 본 뜻이 어떻든 간에, 희망에 취해야지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람도 있다.
내가 당신들을 위해, 당신들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 터무니없게만 느껴진다면, 지난 1월 5일 한강진역을 반짝이게 빛냈던 사람들의 사진을 들여다보자. 검색어는 ‘한강진 키세스 군단’. 은박담요를 뒤집어쓰고 거세지는 눈발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눈사람이 되도록 읍소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일단 그 뒷모습이 귀여워서 피식 웃고 나면 웃음 다음으로는 어떤 두근거림이 자리하길 바란다. 얼큰히 퍼지는 희망의 기운에 힘입어, 함께 더 나은 세상을 그려볼 수 있길. 아무도 따갑지 않고, 아무도 춥지 않게, 외롭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