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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May 26. 2022

부족해서 특별한 그림

내 느낌대로 그려보다.

왜 모든 사람들이 같은 순서대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우린 모두 다른데 말이다.



드로잉 연습을 1년 동안 꾸준히 해보기 전까지는 그림은 타고난 재능이 필요한 영역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림 재능도 없고 무관한 분야에 오래 종사한 사람이었기에 당연히 미술 전공자에게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그림 배우기를 2번이나 시도했지만 모두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3개월 동안 배웠던 두 곳을 비교해보니 공교롭게도 교습과정이 매우 흡사했다.

처음엔 선 긋기를 2주 정도 했다. 그러고 나서 투시도에 따른 직육면체를 그렸다. 빛의 방향에 따른 그림자를 이해한 후 직육면체에 그림자를 그려 넣었다. 삐둘빼둘 줄 맞추느라 연필심의 강약을 조절하느라 아픈 팔과 어깨 주물러가며 지겹게 연습한 선긋기 실력을 발취해서 최대한 꼼꼼하게 흑연의 농도를 맞추어 줄 것을 요구받았다.


그다음엔 원구와 원기둥을 순서대로 그렸다. 그러는 동안 점점 그림이 재미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얀 석회로 만든 입체 도형은 내가 그리고 싶은 것도 아닐뿐더러 반복된 선긋기로 입체를 표현하는 느낌은 마치 지구별을 방문한 외계인이 되는 느낌이었다. 아, 왜 이렇게 재미없게 배워야 할까?


사람도 그리고 고양이도 그려보고 싶은데,
난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니라는 뜻인가?



그렇게 시키는 대로 컵, 화병, 캔을 그렸고 모작도 따라 했지만 지겨운 느낌은 해결되지 않았다.


이런 식의 교습 방법이라면 그림은 노동의 반복으로 익혀야 하는 기술이지 않은가?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한 테크닉도 당연히 배워야 하지만 왜 늦은 나이에 그림을 그려보겠다고 어려운 마음을 먹은 늦깍이 성인에게 굳이 수학 공부처럼 계단식 학습 과정으로 가르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림이 주는 기쁨의 선물을 누리면서 배우는 방법은 없는 걸까? 나만의 배움의 속도와 방향에 맞게 비틀거리며 배우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가르침에 실망했다.


누구는 색으로 자신만의 느낌을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테고, 누구는 선이 주는 느낌을 만끽하며 그리고 싶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극사실화를 추구하며 또 어떤 이는 상상의 세계를 그리고 싶을 한다. 그런데 이런 욕망의 표현은 똑바로 선을 그을 때까지 혹은 사진처럼 사실대로 그릴 수 있는 능력을 제대로 익힐 때까지는 드러내지 않도록 억눌러야 한다는 뜻인가? 반골 기질이 강한 나로서는 쉽사리 수긍하지 못했다.


애초부터 내가 원하는 스타일과 느낌대로 그림을 배울 수 없다면  차라리 혼자 연습하기로 결심했다.

1년 동안 1일 1드로잉을 해오며 그리고 싶은 대상을 직접 골라 연습했고 막히는 부분은 책과 유튜브 강의를 통해 해결했다. 변화는 느리고 느리게 왔으며 결과는 비선형적으로 왔다.


그림을 독학으로 배우면서 가장 크게 배운 점 중 하나는 변화와 성장은 절대 계단식 점프가 아니라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비선형적으로 온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날은 그만두고 싶을 만큼 초창기 보다 못한 바닥 실력으로 떨어졌다가 괜찮아질 만하면 제자리 걸음으로 정체했고 성장은 있기나 할까 싶을 만큼 더뎠다. 그러나 제자리 걸음 같던 실력도 1년 지나고보니 꽤 달라져 있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도 변치 않았던 것은 매일 그렸다는 사실과 정해진 방향 없이 마음이 가는대로 그렸다는 점이다. 결과물을 두고 일희일비하는 날도 많았지만 오롯이 내 힘과 느낌으로 그려낸 그림은 매번 화실 선생님이 수정해서 매끈하게 완성해준 그림과는 확실히 달랐다. 지겨움이 아니라 나를 이겨냈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 거부했던 것은 기술을 익히기 위해 이겨내야 할 반복의 지겨움이 아니라 꿈틀꿈틀 숨길 수 없는 충동에 가까운 나만의 느낌이 잘못 되었다고 고쳐야 한다고 지적하는  권위였다.   


느낌은 서로 다른 것이지
정답은 없지 않은가?


최근에는 색채에도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어 오일 파스텔 특별 강좌를 들었다. 재료 공부를 끝내고 내가 보는 색상과 느낌대로 레몬을 그려보았다.

어딘가 완성도와 디테일은 한참 부족한 그림이지만 그래도 내겐 특별하다. 내 느낌을 있는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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