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을 넘어서면서부터 이 지긋지긋한 출근 감옥에서 해방되고 싶다고 매일 소원을 빌며 살았던 것 같다. 고작 몇 분 빨리 가겠다고 젖은 머리카락 미처 말리지도 못한 채 사거리 신호등을 기다리며, 아무렇게 쑤셔 둔 타월을 꺼내 머리를 말리며 다짐을 하곤 했었다.
“이렇게 계속 살기엔 내 인생 너무 억울해. 이렇게 찬란한 날씨에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아야 하나? 저기 저 사람들처럼 알록달록 등산복 입고 산으로 가고 싶어. 아, 여기만 아니면 살 것 같아.”
당장 아이들 학원비와 대학 등록금 그리고 미련이 남은 직장인 커리어를 포기하지 못한 채 10년이 지났다. 올해 드디어 큰 아이가 군대 가면서 1년의 틈새가 생기자 아무것도 재지 않고 바로 1년의 무급 휴직을 나에게 선물했다.
그렇게 휴직하기만 해 봐라며 벼르던 나는 잘 살고 있나?
갑자기 늘어난 아침 시간이 황홀했다.
소파에 던져 놓은 아이 옷가지와 양말을 봐도 쌓인 쓰레기통을 봐도 화가 나지 않았다. 휴직 생활 어떠냐는 친구의 말에 행복 전도사처럼 대답을 했다.
“그동안 내가 늘 화가 나 있었던 이유를 조금은 알겠어.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없으니 늘 쫓기는 마음에 화가 났던 거야. 이렇게 시간이 많으니깐 세상 화 낼 일이 없어~”
시간은 써도 써도 남아돌았다. 매끼 먹을 국과 반찬이 최대 고민거리가 되었다. 오전에 느긋하게 커피 내려 직접 구운 빵으로 브런치를 만들어 먹고 제자리에 있어야 할 물건을 정리한 후 집안 청소를 했다. 오후엔 잠들어 버릴까 걱정하며 앉지 않았던 리클라이너 소파에 깊숙이 등을 집어넣고는 독서를 했다. 그래도 남는 시간은 카페에 혼자 가서 책도 읽고 글도 썼다. 때맞춰 아이 학원으로 가서 픽업만 하면 저녁이 찾아오고 자면 되었다.
3개월이 지났다. 여전히 산엔 가지 않는다.
이젠 쓰고도 남았던 시간이
점차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요리도 청소도 매일 할 것이 못되고 빵도 사서 먹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독서 대신 유튜브와 드라마에 빠지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독서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카페의 오전엔 주차 자리가 없다. 온통 수다가 필요한 사람들로 꽉 차있다. 이쪽 수다가 저쪽 수다를 이기려다 보니 늘 상대적 데시벨을 높이기 마련인지라 시끄러워도 너무 시끄럽다. 말벌떼 소리가 따로 없다. 결국 산이 아니라 다시 집이다.
아침 일곱 시 아들이 등교하고 나면 25년간 간절히 원하고 원하던 조용한 시간이 오롯이 다 내 거다. 사람들에게 하도 신물이 나서 몇몇을 제외하고는 웬만하면 연락을 삼갔더니 그 시끄럽던 카톡도 이젠 조용하다. 오늘은 앉아서라도 봐야지 하지만 어느새 소파에 머리를 뉘인 채 유튜브 채널을 뒤적거리고 있다. 어디 뭐 재미난 거 없나? 역시 유튜브 AI 가 깔맞춤으로 찾아준 추천 동영상은 도저히 피할 길 없음에 절로 감탄한다. 연달아 보고 있자만 점점 눈이 뻑뻑해지고 멍해진다. 결국 짧은 몇 초로 자극을 만족시키는 shorts 영상에 빠지고야 마는 정해진 수순으로 어어진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시간은 물리적 개념이 아니라 심리적 개념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있다.
“이러려고 휴직한 건 아닌데 그렇다고 뭘 하고 싶진 않아. 그럼 어떡하지?” 꼬리를 무는 고민에 빠진다. 잠시 고민하다 정신 차렸다고 생각했는데 시계를 보는 순간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또 잠에 빠졌던 것이다.
무기력의 늪에 빠진 느낌이다. 얼마 전까지는 잠 실컷 자는 것이, 하루 종일 드라마 보며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지금은 대책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스크린 중독에 빠진 좀비같다고 또 불만이다. 기깔나게 놀아주겠다는 호기로움은 온데간데없고 또다시 저기를 소망하고 있다.
놀아도 시원하지 않고 딱히 뭘 해도 편하지 않다.
쉬면서도 쉬지 못하는 내가 안쓰럽다.
어떻게 쉬어야 할까?
아무래도 산에 가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