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얼떨결에 따라가다 보니 눈치 보느라 대충 그리다 말았다. 다음엔 눈치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기에 두 번째는 가장 마음에 드는 뷰를 찾아 남들 신경 쓰지 않고 그렸다. 그래도 아쉬움은 또 남았다. 미니 팔레트에 12가지 색 물감을 가지고 갔더니 조색 능력이 부족한 탓에 밋밋한 색으로 대충 마무리 해버렸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그림을 끝내고 다른 사람들의 그림과 물감 재료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 파란 하늘을 닮은 양철 지붕 색상이 한 눈에 쏙 들어왔다. 나도 따라 칠하고 싶었는데 도저히 조색을 할 수가 없어 포기한 색이었다.
“어떻게 조색하신 거예요?”
“이건 조색한 것이 아니라 올드 홀랜드사 제품이에요~ 예쁘죠?”
너무 갖고 싶어서 검색을 했다가 그만 가격을 보고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24색 가격이 약 50만원대이다. 후~아! 이미 2절 아르쉬 중목 종이를 1만원을 주고 구입하면서 비싼 종이가 부족한 실력을 몇 단계 끌어올린다는 것을 체험한 바 있지만, 이 물감은 비싸도 너무 비싸다. 간 떨려서 도저히 못 살 것 같다. 결국 포기하고개당 몇 천원씩 하는 국산 물감 브랜드에서 비슷한 색상 이름을 검색하여 장바구니에 넣었다.
아, 견물생심으로 이미 불붙은 욕심을 어쩌랴!
왠지 저 고급 물감으로 칠하면 그림이 확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을 도저히 버리지 못하겠다. 결국 고급 물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유명한 어반 스케쳐들의 팔레트를 폭풍 검색했다. 국산 물감의 2~3배 가격에 해당하는다니엘 스미스 하프 사이즈 물감을 10개 추가하고나서야 욕망이 식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고급 물감은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갖은 고심 끝에 지른 물감이내 손안에 들어왔는데도 웬일인지 2주가 지나가도록 뜯어보는 것도 귀찮아서 내팽개쳤다. 결국 3주 뒤 카페 드로잉 공지가 뜨고나서야 마지못해 물감 포장지를 뜯고 부랴부랴 정리했다.
분명 고급 물감이 도착하기만을 들뜬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막상 꺼내지조차 않고외면하는 이유가 뭐지? 나 자신 조차이해되지않으니 그저 답답하고 짜증만 날 뿐이었다.
도대체 이건 무슨 심보일까?
세 번째 카페 드로잉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붓칠로 성질을 내다 그 이유를 찾아냈다. 현실적 결과를 직접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맞닥뜨리기를 회피했던것이다.
그 어떤 고급 물감으로 칠한다 하더라도 결코 부족한 실력을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무의식은 알고 있었다. 허지만 인정하기 싫었던 자의식은 애써 외면하며모른척 했던 것이다. 마치 눈으로 보고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의식이 거부하는 것에는 이유를 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꼭꼭 감추려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자기이해가 되고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글 쓰기도 그랬다. 술술 잘 쓸때까지, 글감이 툭 떨어질때까지 미루고 미루다보니 결국 글을 안 쓰고 못 쓰는 ‘나’만 남아 있었다.
분명 글이 안 써진다고 고민할 때도 일단 쓰기부터 하자는 결론에 도달했건만, 정말이지 무의식적 부정적 사고패턴을 고치는 것이 이렇게도 힘들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