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나서도 한줄 독후감을 쓰는 것을 좀 미루게 됐다. 너무 참혹한 얘기라서 그렇다. 물론 누군가는 해야할 이야기이지만, 꼭 문학, 예술의 몫이어야 할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맞다는 생각이 든다. 삶에 분명 존재하고 있는 참혹함, 모순과 아이러니, 비참함에 대해 누군가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소설이 가장 효과적인 증언자가 될 수 밖에 없겠구나 싶다.
인간적 제도와 규범, 소위 사회 관습적 준거와 기준이라는 합리적 효율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상처와 폭력이 되는 그 속에서, 마지막 남은, 그 단 한명의 소외된 사람이라고 해도, 안아줄 수 있는 것이 문학이다. 내가 이 나이가 되어 뒤늦게 문학에 미련을 갖는 것도 사실 그 때문이었으니까. 차마 사람의 손은 바라지도 못할 음지의 누군가에게도, 소설이 손을 내밀고 구원해줄 수 있을 것을 안다.
아무튼, '나비'는 아름답다.
소녀도 늘 혼자 노는 아이로, 외로운 사람이 외로운 사람을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소녀는 길고 갸름한 얼굴에 슬픔이 어린 커다란 눈을 하고 있었다'). 소녀의 바램을 읽으며 소녀를 보내기 힘들다는 화자도 공감능력이 아예 결여된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너무 오랫동안 혼자여서 외로움에 지치고 지친 상태일 뿐. 사람을 애정을 소망하고 갈구하는 마음이 너무 오래 방치되어 지친 상태일 뿐. 그러나 외로움에 지친 사람에게 다가오는 나비는, 기회는, 환상과 꿈처럼 아름답고 소중하지만, 드물고, 쉽게 사라진다. 손을 내밀면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사실 엄청 외로운 사람들이 만난 연애도, 처절할 만큼 소중하지만, 오랜 외로움이 빚어낸 칼끝이 결국 서로를 찌르며 끝이 나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외로운 누군가에게 찾아오는 사랑, 나비. 쉽게 잃어서 그리고 다시는 되찾을 수 없어서,
책 제목이 <첫사랑 마지막 의식>인 걸까?
그런데
'시체란 것은 삶과 죽음이 대조되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는 말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어머니의 죽음에도 무감각했던 주인공이 소녀의 시체 앞에서는 조금은 다른 심리적 상태였다는 것으로 느껴졌는데 맞게 읽은 건지도 궁금하다. 즉 자신은 죽은 소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고 굳이 말하는데, 행동으로는 곁을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