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몬>(1915)을 읽고
지금이 깊은 밤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당신은 수백 명의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암흑으로 뒤덮인 벌판에 서 있습니다. 벌판의 한쪽 끝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절벽입니다. 여기서 절벽은 바로 죽음, 수치심, 실패, 외로움, 상실, 무력감 등 모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아무도 그 절벽을 볼 수 없고, 그 낭떠러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제 당신을 포함한 그 벌판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암흑 속에서 당신은 일용할 음식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인생의 동반자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당신은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어떻게든지 피하면서 꾸준히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어둠은 결코 걷히지 않을 것이기에, 당신은 늘 두려울 것이고, 모든 것은 항상 불확실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무시무시한 낭떠러지로 추락하지 않으면서 당신의 삶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 인간이 처한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대처합니다. 무턱대고 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망설이고 주저하느라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남에게 달라붙어서 매달리고, 어떤 이는 절벽 가까이로 끌려가는 것이 두려워서 다른 사람들을 멀리 밀쳐 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포기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도 암흑을 걷어낼 방안을 꾸준히 강구하기도 합니다.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출처] Georg H. Eifert 외 공저, <분노의 갑옷을 벗어라!>, 유성진 역, 학지사, 이너북스(2008)
세월이 흐른 뒤, 당시 노파만큼 나이가 든 ‘하인’은, 그날의 일을 기억할까?
아마도 노인이 될 때까지 거의 매일 반추하며 자책하거나, 노파나 그의 자손들에게 복수를 당하거나 하늘로부터 천벌을 받게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을 안고 살고 있을 수도 있다. 혹은 이러한 감정으로 인한 고통이 너무 커 ‘해리성 기억상실’을 앓게 되거나,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합리화하는 태도가 강화되어, 적절한 정서적 표현이나 친밀감은 억제된 채 고립되고 외로운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타인의 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침해하며, 반복적인 범법행위나 거짓말, 사기성, 공격성, 무책임함으로 일관하는 반사회적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적어도 소설 속의 일화에서 그는, 사회적 규범이나 인간적 도리를 어기는 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꺼림칙해하며 망설이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라면, 삶에서 비참함이 그나마 덜해졌을 때, 그날의 일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고통'받을 것 같다.
그래도 하인이 너무 많은 자책과 수치심에 자신을 ‘무력하고 비겁한 패배자 혹은 실패자’로 개념화하여 벌주려 하지 않으면 좋겠다. 적당히 후회하고 노파에게 미안해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막막한 삶의 조건에 반사적이고 자동적으로 도둑놈이 된 것은 아니라고, 변명도 했으면 좋겠다. 또 잠시나마 인간적 삶의 선과 악에 대해 고민도 했었다고, 스스로 위로했길 바란다. 그래서 '마음의 감옥'에 살지 않았길, 무력했던 자신을 데리고 ‘삶’ 속으로 들어가 조금이나마 성장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길 바란다. 그랬다면 아름다울 것 같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의 <라쇼몬>(1915)과 <덤불 속>(1922)은,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 비극적 사건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신경질적인 기질로 알려진 작가는, 자살로 30대에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번에 그의 소설을 읽고 보니, 실패로 돌아가긴 했어도 실은 ‘세상과 사람들에게서 아름다움과 애정을 발견하려 부단히 노력했던 사람’이라 느껴졌다. 끔찍한 조건에서도 어떻게든 삶을 살아내려 애썼던 그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겠다.
일본 역사를 잘 모르지만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찍 근대화를 이루고, 서양 문물과 제도 중에서도 ‘제국주의’라는 못된 본에 충실했음에도, 인간 삶의 고통스러운 현실은 곳곳에 가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상 어느 곳이라도, 인간이라면 모두 그러하듯이. 차라리 언어를 가지지 못한 동물들이라면, 생존을 위한 자신들의 선택에, ‘괴로움’을 겪진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앞서 소개한 짤막한 글에서도 드러나듯이, 욕구의 충족 여부에 따른 쾌, 불쾌뿐만 아니라, 자신의 욕구나 행동에 대해서도 다양한 판단을 하며, 기본적인 ‘고통’에 더해 ‘괴로움(suffering)’까지 겪곤 한다.
라쇼몬의 주인공 역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삶의 길을 선택할 정신의 자유를 향유하고 싶어 하는 ‘흔하디 흔한’ 인간으로 보인다. 즉 결국 그가 선택한 ‘약탈로 살아남기’에 대해, ‘평가’하고 ‘판단’하기보다는, 잠시나마 고민하고 갈등한 것에 초점을 두고 싶다. 굶어 죽을 수 없어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 동물로서의 본능에 굴복한 비참한 인간이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끔찍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겠다’는 것이 자기 스스로 결정한 삶의 길과 태도라고 여긴다면, 그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인간의 바닥은 어디인가’, ‘어디까지를 인간으로 부를 수 있는가’. 독자들은 <라쇼몬>의 주인공들이 하는 극단적으로 구차하고 비참한 선택에 충격을 받는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시련을 자아성장으로 이끄는 내적 힘과 인간 정신의 자유로움을 발견하고자 하는 나의 시선은 과도한 낙관주의 거나 강박증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설의 소재로 서지만 그들 모두 인간 존재의 표상 아니던가?
소설 속에서 이름도 없이 낮은 신분으로만 표현되는 ‘하인’이지만, 그도 나름 인간으로서의 자유의지를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릴 여유가 없는 막막한 상황이었으나, 그는 조건에 따른 자동적 반응을 하지 않았다. AI나 로봇이라면, 생존을 위한 확률이 높은 선택을 출력하는데 아무런 갈등과 고민이 없었을 것이다. (참, 그건 아니겠다. 요새는 타인의 마음을 읽고 사회적 관계를 맺는 뇌의 신경학적 시스템이 진화적 선택으로 각광받고 있는 세태이니, AI나 로봇을 프로그래밍할 때 이러한 인간의 사회적 욕구도 기본값으로 세팅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도둑놈이 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긍정할 용기를 한동안 내지 못할 뿐 아니라, 시체에서 머리카락을 뽑는 노파에게 격렬한 증오를 느끼기도 한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옳고 그름, 도덕적 가치에 의해 굶어 죽을 수도 있고, 나쁜 타인을 단죄할 수도 있다. 노파에게 강한 증오를 느끼면서도, 움켜쥔 손에 전해지는 앙상함과, 공포에 떠는 그의 모습에, 증오가 식는다. 무력한 인간에게 더 잔인해질 법도 한데, 그는 연민을 느낀 걸까? 한편 노파도 욕되고 구차한 삶에 대한 합리화를 잊지 않는다. 시체가 된 그 여자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굶어 죽겠으니까 할 수 없이 한 것이라고.
결국 하인은 ‘도둑놈’이 되는 쪽을 선택했으나, 하인도 노파도, 변명의 여지없는 악인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살아남겠다’는 자유로운 선택을 한 결과로 인식했을까. 아무리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해도 타인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동까지 했어야 했을까. 그들의 선택은 행동으로 옮길 때 느껴지는 부끄러움과 고통까지도 회피하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선택이었을까. 아무래도 회의적이다. 그리고 사실, 남을 침해하는 행동에 대해서까지 이러한 논리를 적용하는 것은 궤변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우리 주변의 그 ‘흔하디 흔한 인간’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굶어 죽지 않으려 선택한 행동에 대해서도, 변명하고 합리화하며, 인간다움을 완전히 놓지는 않으려는 그런 ‘인간’ 말이다.
전란, 태풍, 지진, 화재, 기근, 역병의 고통 속에서 인간은, 늘 존엄을 잃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짐승이 될 순 없다는 생각 때문에도 고통받는다. 그리고 오히려 인간은, 오랜 세월 후, 기근과 역병으로 인한 고통을 기억하며 괴로워하기보다는, 인간다움을 실천하지 못한 자책, 실패, 수치의 감정으로 더한 괴로움을 겪기도 한다. 같은 인간으로서, 안쓰럽게 여기며, 위로하고 싶어 진다. <라쇼몬>의 하인과 노파에게도, 자신의 욕망을 타당화하지 못하고 상대에게 투사해 분노하고 파멸하는 <덤불 속>의 군상들에게도. 글의 앞머리에 도입했던, 다소 오그라드는 지시문을 이어서 제시하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눈을 감고 그 벌판에 서서 우리 모두가 여기서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느껴 보십시오. 끝을 모르는 낭떠러지를 늘 두려워하면서도, 어떻게든지 움직이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을 돌보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느껴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겁에 질린 채 그 어두운 벌판을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저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러한 것처럼, 그들 역시 절벽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둠 속에서 느끼는 공포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외롭게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는지를 알아차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