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i, Old quebec city!
내가 얼마나 모르고 갔냐면 난 퀘벡주가 불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는지도 몰랐다.
퀘벡여행 3일 차쯤이었나, 어느 가게에 붙어있던 안내문 끝에 Merci가 적힌 걸 보고 검색해 보고 알았다.
어쩐지.. 사람들이 땡큐를 잘 안 하더라고.
으슥한 첫날밤을 보내고 조식도 건너뛰고 당장 올드퀘벡으로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밤엔 그렇게 으슥한 호텔이 아침이 되니 너무 평화롭다.
캐나다 두 번째 집 도착
Auberge Saint-Louis
-개인욕실이 있는 더블침대방이었다. 전신 거울과 1인 소파가 있었고, 거친 나무바닥도 좋았다. 문 밖 복도 소리가 좀 들리긴 했지만 3박 지내는 동안 편안했고, 무엇보다 위치가 샤토 프롱트낙 호텔에서 가까워서 좋았다. 직원도 친절해서 체크인부터 기분이 좋았다.
호텔 밖에서 카운터까지 짧은 계단의 위기가 있었지만, 하루 사이에 전완근이 단단해졌는지 이 정돈 껌이었다. 이번엔 다행히 방까지 짐을 올려다 주셨다. 방까지 올라가는 내내 손에 팁을 쥐고 어떻게, 언제 드릴지 고민했다.
팁 문화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고맙기보다 약간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괜스레 공손하게 팁을 드리게 된다. 뭔가 일 부려먹고 옜다 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은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어색하기만 하다.
일단 침대에 몸 한 번 던져보고 바로 일어나 제일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와… 나 진짜 왔구나…
어제까지의 긴장감은 싹 사라지고 설렘 밖에 안 남았다.
바로 도깨비 호텔로 가고 싶었지만, 어젯밤부터 물 한 모금 안 마셔서 수분 보충이 시급했다.
카운터에 가까운 마트를 물어보고 천천히 길을 걷는데, 도로 옆으로 말이 지나간다.
관광용 마차겠지만 잠깐이나마 이곳의 옛날 모습을 엿보고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말을 시작으로 이 날 내가 숙소를 나가서 봤던 몇 분간의 풍경은 캐나다에서 모든 기억을 통틀어서 가장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다.
특히나 아래 사진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진이다.
특별할 것 없는 건물과 하늘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아니었던 것 같다.
유난히 걱정 많던 22살의 긴장감이 비로소 설렘으로 바뀌어가는 그 순간의 감정이 이 사진에 함께 찍혀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곤 한다.
순간 느껴지는 바람의 시원함, 애써 고개를 들지 않아도 보이는 구름의 움직임, 뒤 쪽에서 들려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소리.. 오직 나만 알고 있는 이 찰나의 순간을 당신들은 공감하지 못할 것이라고 괜스레 으스대고 싶기도 하다.
건물들 사이로 도깨비 호텔이 보인다.
이제 막 웅장한 호텔의 자태에 감탄하고 있을 때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배도 고팠겠다, 일단 눈앞에 보이는 스타벅스로 향했다.
어느 나라든 스타벅스가 마치 동네 카페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데, 아마 낯선 식당과 카페들 사이에서 메뉴와 주문방법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국과 조금 다른 점은 주문을 마치면 이름을 물어보는데, 순간 당황해서 그냥 내 한국이름을 불러줬다.
역시 제대로 못 알아듣고 다시 물어보길래 그냥 성을 말했다. 직원이 살짝 웃었고, 나는 결국 'Ho'가 적힌 녹차 프라푸치노를 받았다.
내 성은 'Oh'다..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나니, 비가 어느 정도 그쳤다.
먹구름 아래 샤토 프롱트낙 호텔은 곧 신이 저주라도 내릴 듯 위엄 있었다.
숙소에서 우산을 다시 챙겨 나와 다시 뒤프랭 테라스로 향하는데,
테라스 동상 앞에서 한 할아버지가 바이올린으로 도깨비 OST ‘Beautiful’을 연주하고 계셨다.
갑자기 불어난 한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선곡이었겠지만,
그래도 여행객인 나에게 그 순간은 참 반가웠고, 감사의 마음으로 2달러를 드렸다.
올드퀘벡은 굉장히 작은 마을이기 때문에 따로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천천히 구경하기 충분했다.
한 바퀴 주욱 길을 걷다 보니 드라마 '도깨비'에 나왔던 크리스마스 마켓이 보였다.
La Boutique de Noel de Quebec
-1년 내내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놓은 가게이다. 드라마 ‘도깨비’에도 등장한다.
가게 문을 여는 순간, 환상적인 뷰가 펼쳐지는데 생각보다 가게 규모가 커서 전시회 같은 느낌도 난다.
각종 트리 장식들이 시선을 사로잡고 한 층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눈을 즐겁게 한다.
사계절 내내 크리스마스 기분을 낼 수 있는 재밌는 장소였지만, 과연 장사가 잘 될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가게를 나왔다.
호텔 위 쪽으로 쭉 따라 걸으면 아래로 향하는 계단 앞에 이정표가 하나 나오는데, 드라마 속 은탁이가 김신에게 장난스럽게 '아저씨, 사랑해요!'라고 고백하는 장면의 배경으로 등장했었다.
계단을 내려가면 '쁘띠 샹플레'라는 아기자기 예쁜 거리가 시작되고, 그 길을 쭉 걷다 보면 은탁이와 김신이 한국에서 퀘벡으로 이동했던 빨간 문이 있다.
여느 한국인들 같이 인증샷을 찍고, 미리 찾아놨던 식당으로 갔다.
Cochon Dingue
-한국어로 ‘미친 돼지’라는 뜻인데, 다른 음식은 안 먹어봤지만 Maple-smoked rip이 정말 맛있었다. 메이플 시럽을 입힌 포크 립 요리인데, 달달한 감칠맛이 맥주와 잘 어울렸다. 언젠가 퀘벡을 다시 가게 된다면 꼭 다시 가겠다고 결심했던 곳이라 혹시 이 글을 보고 누군가 올드퀘벡을 가게 된다면 정말 꼭 가봤으면 좋겠다.
이 식당에 들어가기 전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당시 나는 가게 앞에서 어떻게 주문하고, 계산은 어떻게 할지 등등의 별 걱정 같지 않은 걱정으로 망설이고 있었는데, 어느 한국인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오셨다.
'한국인이에요?'
혼자 여행 왔다고 하니, 아주머니도 혼자 여행 중이라고 하셨다. 몇 달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시고, 이번 퀘벡 여행이 끝나면 그리스로 넘어가서 한 달간 여행을 이어가신다고 한다.
나에게 유럽은 가보았냐고, 유럽에 비하면 퀘벡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유럽은 꼭 가보라고 호탕하게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이 멋지고, 부러웠다.
잠깐이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혼자 외국에 나온 게 처음인데, 어제 막 도착해서 아직 혼자 제대로 된 식당에 가본 적이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었다는 마음의 고민도 은근슬쩍 털어놨다.
아주머니는 하하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아~ 그냥 들어가서 먹고 싶은 거 주문하고 나올 때 팁 좀 주고!
별 거 없어. 한 개도 걱정하지 마!‘
외국에서 혼자 식당에 가는 일은 당시 나에게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별 거 아니라는 듯 호쾌하게 말해주는 그녀에게 나는 용기를 얻었다.
그녀와 헤어진 후, 나는 바로 식당으로 들어가 음식을 주문하고, 계산하고 팁도 냈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그냥 굶을까 생각이 들었던 내 모습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나도 당연히 안다. 식당에서는 주문하고, 먹고, 계산하는 일만 하면 된다.
이 당연한 말을 별 거 아니라고 해주는 그녀의 따듯한 말이 참 안심이 되었던 것 같다.
만약, 그녀가 냉소적인 태도로 '그걸 왜 못해?'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여행을 하다 보면 식당에 가는 것쯤이야 언젠가 익숙해졌겠지만, 적어도 그날 한 끼는 굶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첫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긍정적인 첫 경험은 자신감을 주지만 부정적인 첫 경험은 깊든, 얕든 트라우마를 남긴다.
결과적으로 시간이 지나면 모든 일은 어떤 방식으로든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순간들을 내가 어떤 감정과 생각으로 채워가느냐는 중요한 문제이다.
인생은 결과가 아니라 경험의 연속이니까.
그녀가 없었어도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외국의 어느 식당에서 자연스럽게 주문하고 밥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 덕분에 나는 긍정적인 첫 순간을 경험했고, 그 뒤로 다녀온 수많은 해외여행들에서도 이런 바보 같은 걱정은 안 했다.
별 거 아닌 일 같지만, 정말 별 게 아닌 일이었을까?
이제 막 세상을 경험하려는 젊은 대학생을 응원해 준 그녀에게 나는 아직도 고맙다.
2023년, 직장인이 된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문득 도대체 그녀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돈을 얼마나 벌길래 그렇게 여행을 다니며 사는지가 궁금해진다.
22살의 나는 그녀를 보며 '삶의 자유로움'에 대해 생각하고,
지금의 나는 그녀를 생각하며 '경제적 자유로움'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지금 그녀를 다시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그때 그리스 여행은 잘 마무리하셨나요?'라고 할까,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여행 많이 다니실 수 있었나요?'라고 할까.
부디 순수한 호기심으로 그리스 여행에 대해 궁금해하고 싶다.
*2017년 여름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