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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배르니 May 05. 2022

'초민감자'와 번아웃

조금씩 다르게 해 보기

회사를 쉬기로 한지 두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별로 친하지 않았던 회사동기 A에게서 카톡이 왔다.


"헤세드야~ 잘 지내니! 나 청첩장 나왔는데 소식 알리려고 연락해ㅎㅎ"


그 카톡을 보고 내심 놀랐다. 평소에 그렇게 친하지도 않을뿐더러 얼마 전  A가 본사에 들렀을 때, 내 소식을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속으로 생각했다. 병가로 회사를 쉬고 있는 친구에게 연락을 할 땐, 먼저 이렇게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헤세드야~ 몸은 좀 어때?" 혹은. "걱정돼서 연락했어"라고. 설령 진심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사실은 청첩장을 주려고 연락했거나, 내 안부는 딱히 궁금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네가 병가 중인걸 깜빡했나 보지"

"그래도 동기라서 청첩장 주려고 한 거 보면 나름 친하다고 생각해서 챙겨준 거 아닐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나도 알고 있다. 난 이런 미묘한 어감의 차이를 느끼고, 말에 담긴 이면의 의미까지 파고드는 '초민감자'다. 내가 초민감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 건 2년 전이다. 사무실에서 '평소 화가 많기로 소문난' 과장님의 짝꿍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탁! 탁탁탁! 탁탁! 타다닥!"  


조용한 사무실에서 굉장한 소음이었다. 그 과장님은 언론 담당자였는데 기자들과 통화하다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전화를 끊고 키보드가 부서질 정도로 타자를 쳤다. 격한 감탄사와 경이로울 정도의 거친 언어를 구사하곤 했다. 그 키보드 소리는 나에게 심각한 소음이었다.  당시 글을 쓰는 게 업무였던 나는 과장님의 맛깔스러운 키보드 연주곡이 시작되면 잠시 자리를 피하거나, 사내 카페에 가서 살찔까 봐 자제하던 '아이스 연유 라테 샷 추가'를 사 왔다. 내가 그 과장님의 옆 자리이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크게 불편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매번 그 소리를 못 견딜 정도로 괴로워했던 나는 그때 알게 됐다. 내가 지나친 공감능력 때문에 같은 상황에서도 감정적으로 더 많이 괴로워하는, '초민감자(Highly Sensitive Person)'라는 사실을 말이다. 

 

요즘 예민함과 초민감자에 대한 책이 많이 나온다. 몇몇 사람들은 예민한 사람은 섬세한 거고, 초민감자는 직감이 뛰어나고 공감을 잘해서 치유자가 될 수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초민감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사는 건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조용한 버스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는 소리가 내 귀에다 대고 말하는 것처럼 크게 들리고, 산책로에서 달리는 오토바이를 볼 때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딱, 딱, 딱!' 절간이 따로 없는 사무실에서 부장님이 자리에서 손톱 깎는 소리를 듣고 저 파편들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상상을 하며 비위가 상한다. 다른 사람들은 크게 느끼지 못하거나 "에휴 어쩌다 그럴 수도 있지~"라며 넘기는 일들을 나는 온몸으로 흡수한다. 그리고 외로워진다. '내가 유별난가?' 마치 인간들 사이에서 혼자 외계인이 된 것 같다.


초민감자들은 타인의 감정과 에너지를 과도하게 느끼고 흡수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 가는 게 힘들다. 고된 하루를 보낸 날에는 꼭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회복이 된다. 그리고 기가 센 사람들보다는 같은 초민감자와 함께 있는 게 안정을 취하는데 도움이 된다. 내게도 아주 가깝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초민감자 친구가 있다. 꿈 많고 사랑스러운 '앨리스' 같은 언니다. 앨리스 언니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유난스럽고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된다. 


그리고 얼마 전 금쪽 상담소에서 '초민감자'인 연예인에게 번아웃이 온 이야기를 봤다. 모든 감각이 굉장히 민감하기 때문에, 나한테 몰두하는 에너지와 주변에 집중하는 에너지까지 더해져 에너지 소모가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번아웃이 온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중에 초민감자인 이유도 있지 않을까 싶다. 달라진 업무환경에서 잘 해내기 위해 발현된 완벽주의와 인정 욕구, 강박까지 더해져 주변의 사람들과 분위기에 내 에너지를 과도하게 쓴 건 아닐까? 


알고 있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 하루아침에 무던해질 수 없을 것이고, 민감한 성격이 완전히 바뀌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초민감자의 성향이 나를 갉아먹고 있다면 조금이라도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세상과 담쌓고 집안에 틀어박혀 히키코모리처럼 혼자 살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래서 오늘 청첩장을 주겠다고 연락했던 A에게 카톡을 보냈다. 평소 같았으면 이미 속이 상했지만, 아닌 척 축하한다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하거나, 그 조차도 대꾸하는 게 힘들어 답장을 안 했을 나다.


"A야~ 얼마 전에 청첩장 주러 본사 다녀갔다는 얘기는 들었어. 결혼 축하해! 얘기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나 지금 몸이 안 좋아서 병가 중이라 예식장은 못 갈 거 같아. 모바일 청첩장으로 보내줘"


A는 내가 아파서 쉬고 있다는 걸 들었다고 했다. 얼른 나와서 회사에 나오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모바일 청첩장을 보내줬다. 나도 A가 나에게 악감정이 없다는 걸 안다. 그리고 내가 예민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똑같은 말이라도 "아프다길래 걱정돼서 연락했어"로 시작해서 "이번에 결혼하는데 너에게도 꼭 알려주고 싶었어"라고 말한다면 듣는 사람이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내가 누구를 걱정하겠는가. 하지만 오늘은 비록 '초민감'했음에도, 회피하지 않고 내 상황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내가 굉장히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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