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이다. 오월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라는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하고,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신 부모님께 선물을 하고나면 정작 내 선물은 없는 것이 어른이들의 현주소다. 헛헛함을 뒤로한 채 회사에서 야근에 시달리는 어른이들에게. 김동률이라는 오월의 산타가 선물을 들고 왔다. 다름 아닌 ‘황금가면’이다.
<황금가면>은 2023년 5월 11일 발매된, 김동률의 신곡이다. 무려 4년 만이다. 싱글앨범으로 발매되었는데, 제목이 파격적이다. 만화 주제가나 드라마 OST로 오해받기 딱 좋은 이번 제목은 지난 김동률의 곡들과 결이 다르다. ‘감사’, ‘동행’, ‘답장’ 등의 두 글자 제목이 유독 많았던, 시적이고 진지한 느낌의 곡들이 주를 이뤘다면 이번에는 전혀 다른 콘셉트임을 제목에서 예고한다.
무려 어린 시절에 봤던 지구수비대 파워레인저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나는 영웅이 될 거라고 외쳤던 소년이 커서 직장인이 되었을 때. 세월과 사회에 치여 사라진 줄만 알았던 내 안의 어린아이가 이따금씩 꿈틀거리는 그 순간을 노래했다. 정의와 승리, 꿈이라는 단어 앞에서, 도무지 가만히 있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 어린아이가 삼십 년 만에 겨울잠에서 깨어날 때 벌어지는 일을 다뤘다. 뮤직비디오도 오피스 판타지다. 지구수비대도 등장하고, 전기도 CG로 흐르고, 뮤지컬처럼 댄서들도 등장하고, 조우진도 춤을 춘다. 자칫 유치하여 반감이 생길 수 있는 이번 콘셉트를 조우진이라는 명배우가 뮤직비디오에서 꿋꿋하게 밀어붙인다. 결과적으로 설득당했다. 눈물이 났다. 김동률의 페르소나는 공유와 이동욱에 이어 이번에도 옳았다.
4분 1초간의 음원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있노라면 한 편의 뮤지컬이 그려진다. 곡 전체 작업을 미디가 아닌 리얼 어쿠스틱 사운드 녹음을 했다고 한다. 요즘 시대에 장인정신이 있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원하는 소리를 날 것으로 한 땀 한 땀 수놓겠다는 의지와 정성이 느껴진다. 코러스만 100개가 넘는 트랙. 화려한 화성으로 뮤지컬 판타지의 정수를 보여준다. 피아노에, 기타에, 드럼에, 브라스에, 김동률의 절절한 보컬이 빠른 BPM으로 황금가면을 노래하며 달린다. 청춘의 울컥함이 배가된다. 한 트랙, 한 트랙을 개별 녹음 한 뒤 전체적인 밸런스를 맞추는 작업을 ‘믹싱’이라고 하는데, 트랙이 많다보니 이 작업만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김동률의 완벽주의는 리스너로서는 너무 감사하다. 이런 고퀄리티의 음악을 대중가요의 형태로 들을 수 있다니.
과연 이 노래는 김동률이 어른이에게 주는 선물이자, 본격 어른이 해방송이다. 노래를 듣는 순간만큼은 솔직해져도 좋다.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저마다의 황금가면을 떠올려보자. 꿈, 정의, 승리 같은 영웅심리에 도취되어 보자. 착한 사람은 지키고 나쁜 사람은 벌하는 권선징악을 믿어보자. 세상에지지 않고 밥벌이를 하고 있는 나를 영웅이라고 여겨주자. 울고 싶으면 울고,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노래를 부르자. 짜증이 나면 소리를 지르자. 숨통이 트이게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봐주자. 고작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해방을 실천해보자.
이 곡을 들으며 눈물이 났다면, 단 한 명이라도 나를 위로해준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테다. 생각보다 위로받을 일이 별로 없다. 살면서 일어나는 생채기는 처신의 영역이지, 누군가에게 토로할 에너지도 없다. 그럴 때면 이어폰을 귀에 꽂을 뿐인데, 어른이들을 위한 힐링송이 별로 없다. 음원 차트만 봐도 아이돌 음악과 트로트 음악, 이별 노래가 대다수다. 그런 와중에, 김동률이라는 존재가 작정하고 나서서 이런 식의 감동적인 위로를 건네다니. 그것도 이렇게 유쾌하면서 센스있는 위로를 말이다. 내 안의 어린아이에게 들려주자. 그동안 밥벌이의 고단함을 이겨내느라 애썼다고. 너는 영웅이라고.
서쪽 하늘 끝에서 번쩍이는 섬광에
나쁜 사람 모두가 벌벌 떨게 될 거야
착한 사람 지키고 홀연히 사라지는
그 모두가 기다린 우리들의 황금가면
다 비켜 치워
눈부신 황금가면
여기 간다
고무장갑 펀치에 플라스틱 양동이
빗자루 검 무장한 어린시절 악동이
무찌르고 싶었던 세상 모든 적들은
치열했던 전투로 일망타진 승전보지
그때 나는
의기양양 황금가면이었지
그렇게 시간은 흘러 흘러갔고
세상이 말하는 그 정답이 너무 어려워
아무리 애써도 사라지는
그 시절의 내 꿈들은
어디로 갔을까 당최
정의는 무엇인 걸까 승리는 무엇인 걸까
난 약해져만 가네
서글픈 황금가면
잊혀진 황금가면
빛 잃은 황금가면
숨막히는 퇴근길 거꾸로 탄 전철에
아무 데나 내려서 길을 걷다 올려본
서쪽 하늘 끝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별도 아닌 무엇이 찌를 듯 날 관통할 때
뭔가 울컥
일렁이는 소용돌이 휘젓고
불끈 양 주먹을 쥐고 달려간다
세상이 정해준 내 역할이 맘에 안 들어
이렇게 맥없이 쓰러져갈
하찮은 내가 아니지
가슴을 힘껏 젖힌다
빛바랜 낡은 가면이 잠자던 나를 깨운다
(후략)
- 김동률, <황금가면>
음악평론가 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