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작곡을 전공하고, 노래를 듣게 된 이야기
왜 대중음악이었을까.
클래식 작곡을 전공한 나는 이 질문을 여러 번 되묻곤 했다.
음악을 처음 진지하게 좋아하게 된 계기는 대중음악이 아니라 영화음악이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을 처음 만난 순간의 충격은 아직도 또렷하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을 보고 난 뒤, 나는 <시네마 천국>을 비롯한 그의 필모그래피를 거슬러 올라가며 ‘이런 음악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막연하지만 소중한 꿈을 품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음악이 내 삶의 언어가 될 것이라고는 알지 못했다.
전공까지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중학교에 입학하며 피아노와 결별한 지도 이미 여섯 해가 지나 있었고, 음악은 늘 ‘나중에 취미로 해야 할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여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학교 음악실 근처를 서성였고, 아무도 없는 틈을 타 건반을 눌러보는 일을 반복했다. 다시 시작한다는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입학한 연세대학교에서, 나는 뜻밖의 이유로 행복해했다. 미래의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연습하는 소리를 매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층 연습실에 늘어선 그랜드 피아노 앞 복도를 지날 때마다, 나는 멈춰 서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들은 지금도 어쩌면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고독한 유학 생활을 이겨내며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나처럼, 음악과의 거리를 다시 계산하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재수와 삼수를 거치며 나는 더 독하게 화성학을 공부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교재는 물론, 국내에는 없는 책의 제본본까지 섭렵했지만 학부에 들어와 처음 들은 말은 이것이었다.
“지금까지 배운 건 다 잊으면 됩니다.”
교양 수업 시간에 오선 노트를 펴고 김광진의 ‘편지’를 즉석에서 악보로 옮기며 흥미를 느끼고, 과 동기 방에서 김동률의 노래를 피아노로 연주하며 목청껏 노래하던 우리에게 무조 음악과 현대음악으로의 이행은 일종의 선고와도 같았다. 그 이후의 시간은 ‘조성이 느껴지지 않는 음악’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와 분석으로 채워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공포와 허무가 스민 음악들, 국제현대음악제에서 만난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들, 그리고 ‘누가 더 조성에서 멀어졌는가’를 묻는 기준들.
이 지점에서 많은 이들이 전공과 멀어졌다. 낭만 시대에만이라도 머물게 해달라는 부탁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무렵 내가 택한 방법은, 고등학교 시절 이과생으로 좋아했던 수학과의 접목이었다. 피보나치수열 같은 명확한 규칙을 작곡에 적용하며 곡을 ‘기계처럼’ 써 내려갔다. 그 음악들은 설명할 수는 있었지만 마음이 먼저 반응하지는 않았다. 규칙은 분명했지만, 탈조성을 창작의 언어로 받아들이는 감각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작곡을 전공하며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나는 작곡의 테크닉보다 언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목격한 천재와 수재들처럼 이 시대에 없던 새로운 현대음악을 만들어낼 능력은 내게 없었다. 그 무렵, 내가 택한 탈출구는 라디오였다. 좋아하는 대중음악을 마음껏 틀기 위해 교내 방송국 활동도 했다.
돌이켜보면 피아노와 멀어진 중학교 1학년 무렵부터 나는 이미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EBS에서 세계 음악 기행을, MBC에서 최신 가요와 20세기 대중가요를, KBS에서는 유희열, 김동률, 이적, 루시드폴의 음악을 들었다. 앨범을 사 모으긴 했지만, 그것은 좋아하는 음반 몇 장을 간직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LP 수집가처럼 체계적으로 음악을 축적한 경험도 없었다. 그저 나는 ‘잡식’으로 자라났다. 지극히 보편적인 한국인의 정서를 담은 귀로.
내 인생에서 클래식이 가장 진했던 순간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태어나 처음 ‘이 음악이 좋다’고 인지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 삶의 절반 이상은 대중음악과 함께였다. 클래식에 대해 글을 쓰면 어딘가 갑갑함을 느끼는 나 자신에게 이유를 묻곤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단순했다.
대중음악이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음악을 끝까지 이해하고 싶어서, 클래식까지 가닿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학부를 마친 뒤 다시 마주한 대중음악은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우리가 왜 유재하를 사랑하는지, 왜 들국화의 음악에 반복해서 이끌리는지, 그리고 어떤 음악은 왜 지금 이 순간 차트에 오르는지. 그 질문들이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적인 구조와 선택의 결과로 보이기 시작했다.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를 다시 들으며, 전주부터 살포시 내려앉는 현악 4중주의 애틋함이 왜 우리에게 단번에 ‘사랑’으로 인식되는지, 1절의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과 2절의 ‘나 오직 그대만을’이 같은 멜로디이나 왜 다른 감정의 밀도로 다가오는지, 내가 배운 화성의 언어로 설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구나 다 안다고 믿는 대중음악의 숨은 원리를 음악의 언어로 설명하고자 한다. 단, 가능한 한 어려운 화성 용어나 악보의 사용은 피한 채로 말이다. 이 책은 이론을 가르치기 위한 책이 아니다. 예컨대 왜 어떤 코드 진행은 이별을 예감하게 만들고, 어떤 멜로디는 같은 가사를 전혀 다르게 들리게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대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해 온 노래들을 다시 듣게 만드는 이유를 묻는 책이다.
내 비평의 언어는 화성학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부터 이어져 내려온 고전 음악의 흔적이다. 가수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나 작곡 배경은 잠시 내려두고, 이 멜로디와 이 비트가 어떻게 수많은 이들의 귀에 남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만약 음악이 왜 이렇게 느껴지는지, 그 다소 과학적인 이유가 궁금하다면, 이 책이 하나의 단서가 되기를 바란다.
음악을 가볍게 넘기지 못하는 성격 탓에, 결국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