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언제나 전주에서 시작된다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by 이예진

창밖에는 바람이 분다. 바람에 흩날리는 소녀의 잔머리, 그 사이로 눈과 코와 입이 은은한 미소를 그려낸다. 어떤 대상을 마주하고 마음속에 무언가 일렁이는 것은 의지의 영역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될 뿐이다. 간지러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감정은 이내 하나의 형체로 굳어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축하한다. 사랑이 시작되었다. 이 불씨는 당신의 인생에 불현듯 나타나 뜨겁게 타오를 것이다. 끝도 없이, 혹은 재가 되어 사라질 때까지.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의 한 장면이다. 배 안에 버려진 레몬 상자에서 발견되어 평생을 바다 위에서 보낸 주인공 ‘나인틴 헌드레드’. 배라는 폐쇄된 세계가 전부였던 그에게 음악은 외부와 소통하는 유일한 언어였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낯선 소녀가 나타난다. 창 너머로 그녀의 얼굴이 가득 차오르고, 소년은 그 눈빛에 홀린 듯 즉흥적으로 피아노를 누른다. 이때 흐르는 곡이 바로 엔니오 모리꼬네의 1)‘Playing Love’다.


스크린샷 2026-02-07 오후 8.39.30.png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The Legend of 1900) 스틸 컷. (c) Medusa Film


내게 이 장면은 사랑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 길을 걸으며 수도 없이 스쳐 가는 얼굴 중, 유독 한 사람만이 마음에 또렷이 각인되는 찰나. 그 특별한 순간을 소리로 치환한다면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전주가 아닐까 싶다. 나인틴 헌드레드가 창 너머의 소녀를 보며 본능적으로 건반을 눌렀듯, 유재하의 전주 역시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을 담고 있다. 유재하의 목소리가 채 나오기도 전, 우리는 이미 ‘아, 사랑이구나’ 하며 속절없이 무장해제 되고 만다.


이 전주가 가진 힘은 선율이 만드는 급격한 ‘낙차’에 있다. 바이올린은 단숨에 치솟았다가 이내 더 깊은 곳으로 떨어지며 마치 알파벳 ‘N’ 같은 가파른 곡선을 그린다. 평온하던 심박수가 예기치 못한 누군가를 마주한 순간 세차게 요동치는 것처럼, 선율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휘몰아치며 마음의 롤러코스터를 태운다. 이 낙차는 사랑이라는 불가항력적 사건 앞에 인간이 겪는 동요를 소리로 그려낸 듯하다.


이윽고 이어지는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이라는 첫 소절은 전주가 휩쓸고 간 자리에 차오른 감정의 파고를 동력 삼아 흐른다. 마치 영화 속 소녀의 얼굴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듯, 노래는 청자로 하여금 저마다의 기억 속에 남은 어떤 눈빛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그 눈빛을 길잡이 삼아 ‘나를 바보로 만들고’, ‘내 곁을 떠나갔다’, ‘다시 돌아온’ 그대의 모습들을 마음속에서 필름처럼 이어 붙인다. 평생 배를 떠나본 적 없는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창밖의 소녀가 세상의 전부가 되었듯, 유재하 역시 이 노래 안에서 오직 ‘그녀와 나’라는 단 두 사람의 관점으로 시간을 기록한다.


이 모든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전주의 강렬한 첫인상, 그리고 그 여운을 한 호흡으로 이어가는 유려한 선율이다. 역동적인 전주를 지나 노래로 들어서면 멜로디의 폭은 오히려 차분하게 잦아들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처음의 큰 낙차가 만든 파동을 따라 우리는 어느덧 그 감정의 깊숙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진입한다. 그렇게 화자의 말과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노래는 마침내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필연적인 문장에 도달한다. 곡의 시작과 동시에 감정의 길을 먼저 터주고, 그 끝에 가삿말로 선명한 마침표를 찍는 방식이다.


유재하의 섬세함은 반복되는 멜로디를 화성적으로 다르게 해석하는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곡의 시작인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과 1절의 끝인 ‘나 오직 그대만을’은 같은 선율이지만 우리가 느끼는 정서는 사뭇 다르다. 처음의 눈빛이 덤덤하고 평평한 고백이라면 후반부의 고백은 훨씬 애틋하고 낭만적인 비애를 머금는다.


그 비결은 선율 아래를 받쳐주는 베이스라인의 ‘하강’에 있다. 유재하는 후반부의 선율 아래로 반음씩 촘촘하게 내려가는 코드를 배치했다. 건반의 흰 건반 사이사이, 검은 건반을 밟으며 조심스럽게 내려가는 이 반음계적 진행은 인간의 페이소스(Pathos)를 자극하는 힘이 있다. 덤덤했던 마음이 사랑으로 인해 점차 깊은 곳으로 침잠하고 있음을, 그는 코드를 바꾸는 세밀한 작법으로 표현한 셈이다.


간주의 기타와 드럼이 등장하기 전까지, 곡은 정갈한 현악 4중주의 호위 속에 흘러간다. 이 구성은 무대 뒤편에서 배경음악을 연주하는 단원들과, 무대 중심에 홀로 서서 진심을 털어놓는 한 남자의 모습을 그려보게 한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말이다. 여기에 클라리넷과 플루트가 얹히며 곡은 한층 순박한 결을 얻는다. 차가운 금속이 아닌 따뜻한 나무로 만들어진 목관악기의 물성은, 이 노래가 취하는 태도와 꼭 닮아 있다. 기교를 부리기보다 투박한 진심을 숨기지 않는 정직함 말이다. 금속성의 매끄러움 대신 나무의 숨결을 머금은 소리는 당시 계산된 기성곡들 사이에서 ‘귀한 순수’로 다가온다.


‘커다란 그대를 향해 / 작아져만 가는 나이기에 / 그 무슨 뜻이라 해도 / 조용히 따르리오’라는 2절 도입부는 이 곡의 마음 깊은 곳에 깔린 비애의 정서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는 상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낮추는 헌신이며, 동시에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나는 숭고함이다.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이 어쩌면 혼자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리고 ‘나’보다 더 커다란 ‘그대’를 동경하듯 바라보는 시선. 노래 속 화자는 사랑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애써 감추지 않는다. 사랑이 지닌 이 서글픈 비대칭성을 미화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이 곡의 매력이다.


<사랑하기 때문에>는 흔히 가사의 미학을 앞세워 이야기되지만, 사실 가사가 흐르기 전 이미 음악으로 우리를 무장해제 시킨다. 굳이 설득하려 애쓰지 않아도 전주의 첫 화음이 울리는 순간 우리는 오해받아도 좋고 바보가 되어도 상관없는 기꺼운 사랑의 상태에 놓인다. 긴 고백의 끝에 비로소 내린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담담한 결론. 곡의 시작에서 먼저 터준 감정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우리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 마지막 문장에서 매번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만다. 이것이 우리가 여전히 유재하를, 그리고 이 노래를 사랑하는 이유다.



1) 첼리스트 요요 마(Yo-Yo-Ma)의 연주로도 널리 알려진 곡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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