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아무개
그녀는 또 캔버스에서 그리던 그림을 갈기갈기 찢이버였다. 도저히 그림이 안나온다. 그녀가 의도한 그 풍경이 담겨지지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그리로 가는 수 밖에. 그녀는 언젠가 여행지에서 언뜻 본 아일랜드의 어느 바다절벽을 그리고 싶다. 절벽으로 부딛혀 부서지는 하얀 파도 조각들, 그녀는 그 생생함을 그리고 싶었다. 아무리 그 장면을 떠올리고 떠올려도 그 모습 그대로 화폭에 담겨지지가 않는다. 결국 그녀는 보면서 그리기로 했다. 짐을 싸고 아일랜드행 비행기표를 보여주며 말했다.‘나 그림 그리러가.’‘아니 뭔 그림을 그린다고 거기까지 간다는 거여?’도대체 그녀의 그림이라곤 이해가 가지 않는 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가기로 하면 가고야 하는 그녀임을 알기에 그는 더는 말리지 않았다. 여튼 앞으로 몇달 간은 독수공방해야 할 신세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그래, 잘 다녀와, 조심하고’ 시무룩하니 잠든 그를 보며 그녀는 미안하고 고마운 복잡합 심정으로 짐을 쌌다.
몇박 몇일이 걸려 도착한 아일랜드, 일단 그녀는 흑맥주 부터 하잔 하고 숙소를 구했다.바닷가 해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 해변을 따라 걷다 보면 절벽이 나오고, 그 절벽에 파도가 부딛혀 부서지는 하얀 파도거품을 볼수 있을 것 같은 그런곳으로.
몇 일을 해매고 다니다 보니 그냥 거기 주민이 된 것만 같았다. 몇년 눌러 앉아 살고 있는 외국인 여성. 혼자 흑맥주를 홀짝이고 있느니 어느 남자가 와서 말을 건다.‘한국인 이시죠? 여기 너무 오래 있지 마세요. 좀 위험할 수도 있어요.’ 한국인인건 반가운데 이건 또 뭔 황당한 소린가? 여튼 대충 무시하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곧 남자는 어느 여자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여자는 맥주는 다 마시고 집에 가려고 나가는데 왠 무리의 집단이 무서운 눈을 하고는 그 카페에 들어가는 것이다. 곧 수차례의 총성이 들리고 그곳은 곧 쑥대받이 되었다. 자세한 슬픈 소식은 다음날 아침 조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아일랜드가 지구의 끝이긴 끝인가 보다. 마지막 도피처가 아일랜드라니. 그녀는 계속해서 그녀가 찾는 풍경을 찾아 해맸다. 카페에서 흑백주를 마시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또 말을 걸어 온다. 처음엔 일본어로. 그 다음엔 베트남어로,,, 그녀가 몇번 웃으며 갸우뚱 거리자 마침내 한국어로 ’아! 한국 분이시구나‘ 이거 제가 헛다리 짚었네요.’라더니 물어보지도 않은 자기 소개를 길게 했다. 자기는 미술 갤러리 일을 하는 사람으로 한국인 인데 가끔 여기로 그림을 그리로 오는 한국인들이 있어 캐스팅 겸 여행 겸 해서 온 거라는 것이다. 그게 다 사실이라면 꽤 괜찮은 갤러리 책임자 였다. 여자는 자기는 원하는 풍경을 찾아 그림을 그리러 왔노라 간략히 자기소개를 했다. 아직은 아마추어라 이름은 말해도 모를 것 같이 말해주지 않았다. ‘아! 그러시구나. 부디 원하는 장면을 잘 포착하셔서 멋진 걸작을 그리시길’ 짧은 말을 남기고 그 남자는 자리를 떴다. 다음 날도 그녀는 걸어서 원하는 장면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한참을 걷는데 뒤에서 누가 불러 세운다. ‘아직 못 찾으신 모양이네요’ 어제 그 남자다. ‘아,네 아직… 그런데 뭐하세요? 캐스킹 하실려면 갤러리 같은 데나 가 보시죠?’‘아, 진짜 들은 이런 데서 우연히 만나는 경우가 많아서요.’‘네~그럼 열심히 찾아 보세요~’여자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고 가던 길을 갔다. 얼마를 더 걸었을 때 그녀는 그녀가 그토록 찾던 바로 그 장면을 찾았다. 그녀는 그 자기에서 바로 캔버스를 펴고 작업을 시작한다. 붓질을 시작할 무렾, 그 남자가 다시 말을 걸어 온다. ‘오늘은 왠지 소득을 얻을 것만 같은데요.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 테니 그리던 거 그리세요.’ 그녀의 귀에는 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미친듯이 캔버스 위에 자신이 원하던 그림을 담던 그녀는 갑자기 커피 생각이 났다. 카페인이 딸렸던 것이다. 두리번 거리던 그녀에게 커피를 내민 것은 그 남자였다. ‘아직 거기 계셨어요?’‘아 신경쓰지 마세요. 그냥 풍경 구경중일 뿐이니깐.’‘커피, 잘 마실게요.’그리고 그녀는 또 미친듯이 붓질을 했다. 그녀는 거기를 일주일을 더 찾았다. 뭐 하나 빠트린 것이 없는지 확인하며 디테일들 까지 하나하나 그려넣었다. 그 날 저녁 카페에서 흑맥주를 마시던 그녀에게 그가 다가 왔다.‘안녕하세요. 혹시 저 모르진 않겠죠?’
’물론이죠, 그때 커피는 잘마셨어요.‘남자는 생각했다. 난 이 여자에게 커피로밖에 기억되지 않는 건가? ’저 내일 서울 가요. 더 황당한 소리였다.’그리시려던 건 다 그리신 모양이죠?‘’네, 덕분에.‘‘서울에서 뵐 수 있을까요?’‘네 인연이 있다면.‘연락처는 말해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둘은 해어졌다.
서울에 도착해서 집으로 왔다.
’자기야 나 왔어‘’응 그릴려던 건 다 그렸어?‘’응 완전 성공적이야. 이거 이번 공모전에 꼭 내야겠어. 나 이번엔 느낌이 아주. 좋아‘’그래 다행이군.’
신인 작가 공모전이 다가 왔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 소중한 작품을 제출했다. 며칠 뒤 문자로 연락이 왔는데 다른 글자는 눈에 안 보이고 ’…대상…‘이라는 문구만 눈에 들어왔다, 아!!!이것이 현실이란 말인가??? 그냥 등단도 아니고 대상이라니!!! 그녀는 이 미칠듯한 기쁨을 남편에게 전했고 남편도 같이 기뻐해 주었다. 워낙 미술에 문외한인 남편 입장에선 그 대회 대상이 어떤 의미인지, 뭐가 왜 대상인지 도통 이해는 안됐지만 여튼 대상이라니 일등이란 말 아닌가 싶어 있는 힘껏 기뻐해 주었다.
수상자들과 갤럴리 운영진들과의 미팅이 잡혔다. 최대한 잘 차려 입고 예쁜 포즈를 취하며 앉아있는데,,, 아! 거기에 그 남자가 있었다. 아일랜드에서 커피를 주던 남자. ’어???‘’어? 왜그래? 둘이 알던 사람이야?‘’아 아일랜드 그 여자‘’이,,, 이건 뭐지?‘뭔가 개운치 않다. 뭔가 자기가 내정자로 정해진 대회에서 상 받은 좀 더러운 기분이다.’저,,,저기요…‘’아! 그런 거 아녜요. 전 작가님이 우리 공모전에 출품할 거란 생각 한 적 없었구요… 그리고 그때 아일랜드에서 그리시는 것보고 우리 공모전에 응모하시면 그냥 안보고도 대상감인데 라고 생각은 했었어요. 그게 다예요.‘’맞아요 이 친구 아일랜드 다녀와서 어찌나 그 얘기 뿐이던지. 물건을 찾았는데, 연락처를 안 가르쳐 준다고. 근데 다 만날 인연은 만나는 건 가봐요. 하하.‘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백프로 실력으로 선정된 것이 아니라면 그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니깐. 그녀는 갤러리와 계약을 하고 정식 작가가 되었다. 아! 미술가, 내가 미술가라니, 그녀는 뛸듯이 기뻤다. 남편도 같이 뛰는 척은 해 주었다. 그녀는 이제 정식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까지는 집구적 한 구석에 캔버스를 놓고 무슨 취미생활 하듯이 그림을 그렸지만 정식 작가인 그녀는 이제 작업실도 마련하고, 작업실로 춛퇴근을 하는 직업 미술가가 된 것이다. 그녀에게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게 남편에게는 묘한 불편함을 주었다. 자신의 패턴에 맞게 삼시세끼가 딱딱 갖다 바쳐지고 퇴근 후는 자신의 유일한 휴식처에서 아내의 서비스를 받으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그런 삶이었는데, 이제는 그게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제 시간에 깨우지 않거나 점심 도시락을 빼먹는 다거나 저녁 목욕물을 받아 놓지 않는 다거나 피곤하다며 성관계를 거부한다거나,,, 완벽한 나만의 여자였던 사람이 이제 자기 직업을 가진 독립된 개체로 변신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화려하고 멋지게. 남자는 생각했다. 지금 이혼해도 저 여자에게 아쉬운게 무엇인가? 내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둘 사이에 차이가 무엇인가? 이럴 거면 결혼은 왜 하는가? 이런 생각들이 쌓이면서 남자는 점점 신경질 적으로 변했다. ’자기 요즘 무슨 일 있어?‘’무슨일? 무슨일은 자기가 있겠지, 작가님.‘’비꼬지 말고. 진짜 속내를 솔직히 얘기해 봐‘ 그래서 남자는 맘먹고 속에 품고 있던 말들을 쏟아냈다. ’… 자기는… 그럴려고 나랑 결혼한거야? 삼시세끼나 목욕물 따위가 필요해서 나랑 결혼한 거냐구?‘’따위?따위라니? 그런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사랑이 별거니? 그런 사소한 게 사랑이야.‘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여자는 직감했다. 약간 고리타분한 면이 있긴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몇일 생각할 시간을 가지자고 한 후 얘기를 끝냈다. 편지를 썼다.’,,, 난 자기가 남편이기 때문에 소중한 거고, 내 생일이나 결혼 기념일 같은 거 까먹어도 까먹는 대로 그냥 사랑하고 산 거였어. 그런 사소한 게 사랑이라면 우린 서로 너무나 사랑하지 않는 거지. 그래서, 우리 그만 여기서 해어지자,,,’그 편지를 받아든 남편은 한참을 부들부들 떨더니 그대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몇일을 들어오지 않았다. 몇일 뒤 남편이 들고 온 것은 합의 이혼서. ‘지금이라도 이거 철회할 수 있어. 자기가 예전의 자기로 돌아 온다면. 예전에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걸 다시 소중하게 생각해 준다며.’‘난, 예전이나 지금이나 소중하게 생각나는 건 변하지 않았어. 당신, 그리고 나. 그걸 오해하고 있었던 건 바로 당신이야.’ 그렇게 둘은 이혼하게 된다. 가슴 저리도록 슬펐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남편이 그런 사람인 줄 미처 몰랐도, 모르고 살아온 세월들도 너무 아깝고 후회가 되었다.
뭐, 괜찮다. 이제 작가 아무개로 살아갈 새로운 삶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열심히 살테다. 내 주변의 모든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리고 그것들을 화폭에 담아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