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철수는 저녁에 아버지가 드실 라면 한봉지와 소주 한병을 들고 집으로 간다. 철수의 아버지는 매일 저녁을 이렇게 드신다. 저녁으로 라면을 먹으면서 반주로 소주를 먹는 건지, 소주를 마시면서 안주로 라면을 먹는 건지 알 수 없다. 여튼 오늘도 그렇게 한병을 비운 후 이어질 아버지의 욕설 섞인 넋두리를 들을 생각을 하니 철수의 가슴은 답답해져왔다. ‘아빠는 내가 고3이란건 알고 있을까?’ 내일이 진로지도를 위한 학부모 면담일인데, 아버지에겐 뭐라고 말해야 하나? 갈 수록 태산이다. ‘대학? 네가 대학을 가?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사는 거야, 이 새끼야’ 안들어도 뻔한 아버지의 반응이다. 아마도 이제 고등학교도 졸업했으니 아버지 부양 제대로 해라고 그럴 것이다.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집으로 올라가는데 희수가 내려온다. 희수는 철수의 소꿉친구이자 이웃으로 산지 십여년이 된 친구이다. 오늘도 라면과 소주병을 들고 올라 오는 철수를 보자 대충 오늘 저녁의 풍경도 이해가 되었다. 희수의 집도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철수와 희수는 전교 5위권 안에 드는 학생 둘로써 대학을 가지 않겠다 하여 학교를 발칵 뒤집어 놓은 두 사람이다. 담임들은 집안 사정을 잘 알아 안타까워도 별 방법이 없었다. 심지어 희수네는 아버지가 딸이 졸업하면 취직해서 돈 벌 공장까지 정해놓고 있었다. ‘안녕’‘응, 안녕, 오늘도 드시네?‘’응 매일 그렇지 뭐‘’내일 학부모 면담인건 아셔?‘’그냥 얘기 안했어‘’그래
…‘철수가 반 농담 삼아 말한다.’그래도 넌 졸업하고 갈 데라도 있어 좋겠다. 난 갈 데도 없어‘’넌 어떡할 거니?‘’난,,, 떠날 거야. 어디든 떠날 거야. 어디든 여기서 아버지에게 라면이랑 소주 사주면서 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떠나? 갈 데는 있고? 무작정 어딜 간다는 거야?‘희수는 덭먹 겁이 났다. 힘든 삶 속에서 그나마 의지하고 살던 친구마저 잃게 될까봐 걱정이 되는 것이다. ‘나 이제 들어가 봐야 되. 늦게 들어가면 혼나.’‘응,,, 떠나지마, 철수야.’
졸업식날 철수가 희수를 찾아왔다. 같이 떠나자는 것이다. 어디든 둘이 같이 살아가면 틈틈이 공부도 해 가면서 지금보다는 훨씬 잘 살 수 있을 거라면서. 희수가 말한다.‘나 아버지를 버릴 수가 없어. 너무너무 불쌍해.’‘불쌍해? 뭐가 불쌍해? 전교 5등 안에 드는 너를 공장에 억지로 보내려는 네 아빠가 불쌍해? 딸 인생을 개똥같이 여기는게 아버지냐고?’ 철수는 희수에게 연락처를 알려주며 마음 바뀌면 언제든지 연락하라 하고는 떠나버렸다. 희수는 엉엉 울었다. 철수의 입을 통해 들은 자신의 처지가 너무 명확해서 울었고, 철수마저 떠나버려서 더 울었다.
희수는 첫 출근을 했다. 공장장이란 사람의 연설을 듣고 작업 반장이란 사람이 일장 연설을 했다. 몇일을 하루 12시간씩 일을 했다. 어느날 작업 반장이 일하는게 왜 이 모양이냐며 단체로 질타를 하더니 희수는 점심시간에 작업반장실로 오라는 것이다. 선배들의 표정은 쑥덕쑥덕 하고 피식피식 웃더니 침을 퉤하고 뱉는 것이다. 점심을 빨리 먹고 작업반장 실에 갔더니 커피를 타 주며 힘든건 없는지, 적응은 잘 하고 있는지 의외의 따뜻한 말들을 몇마디 건네더니, 바로 두 손으로 희수의 상의를 찢어 벗기는 것이었다. 죽을 힘을 다해 저항한 희수는 그 길로 집을 나왔다.이제 갈 데 라고는 철수밖에 없었다. 희수는 철수에게 연락하여 거기가 어디이며 어떻게 갈 수 있는지 물었다. 철수는 반가워하며 여기는 작은 어촌이며 고속버스를 타고 오면 마중 나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둘은 다시 만났다. 철수는 수산시장에서 짐짝 운반을 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비린내 나는 일이지만 철수의 표정은 밝았고 눈빛이 살아 있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다시 수능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도 갈 곳을 정해 두었다. 희수는 자기가 너무너무 바보같이 느껴졌다. 혼자의 힘으로도 이렇게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는데 난 왜 그렇게 바보같은 일을 하며 험한 꼴을 당했단 말인가?
철수는 희수에게 같이 살자고 했다. 같이 살면서 둘이 같이 돈을 벌면 돈도 더 많이 벌고 공부도 서로 도와가면서 더 잘 될 것이라 했다. 희수는 너무 너무 고마웠다. 희수도 다음날부터 수산시장에서 일을 하면서 철수와 같이 수능 준비를 다시 시작했다. 둘다 우수한 학생들이어서 조금만 열심히 해 주면 왠만한 대학은 갈 수 있다.
갑자기 남녀가 둘이 같이 사는 것이 소문이 나자 시장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지만 워낙 순수한 젊은이들이고 서로 남매라고 얘기를 하니 다들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년을 보내고 둘은 다시 수능을 쳤다. 둘다 좋은 성적을 얻었고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었다. 너무너무 기뻤다. 그리고 둘은 계속 같이 살았다. 대학에 가게 되어 숙소를 학교 근처로 옮긴 후에도 둘은 같이 살았다. 더 이상 둘이 따로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민 끝에 철수는 쵸코파이에 양초를 올려다 놓고 결혼 축하파티를 하고, 모조품 반지를 교환하고, 앞으로 더 성공해서 더 화려한 결혼식을 하자고 했다. 그런 철수에게 희수는 안겨서 펑펑 울었다. 물론 외부인들에게는 항상 서로를 남매라고 소개하곤 했다. 뭐, 초야도 치르지 않은 두 남녀가 남매라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철수는 안정적인 가장이 되는 것이 꿈이었기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를 갔고 희수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에 국문과를 다녔다. 그렇게 꿈같은 세월을 대학생으로서 보낸 이들은 벌써 졸업할 때가 되었다. 철수는 전공을 살려 수학선생님이 되었고, 희수 역시 안정적인 가정생활이 중요하다 생각하여 교직을 이수하여 국어 선생님이 되었다. 대학때는 남매라 그러고 그냥 그렇게 같이 사는 것이 크게 어려움이 없었는데, 이제 엄연한 사회인, 주민등록등본 등 기본 개인정보가 노출된 상황에서 둘의 관계를 마냥 숨기고 살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둘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자고 했다. 청혼은 철수가 했다. 반지를 준비해서 무릎을 꿇고 ‘나와 결혼해 주시오’라고 한 마디 했을 뿐인데 희수는 펑펑 울면서 너무나 행복해 했다. 지금껏 자기를 이꿀어 주고 또 정식으로 부부가 되기 전까지 자기를 지켜주고, 또 이렇게 마지막 순간, 다른 생각 하지 않고 자신만 바라봐준 철수. 평생 사랑하고 보답 하리라고 결심했다. 새내기 교사 부부가 근무하는 직장은 행복 그 자체였다. 과거의 불행했던 그 모든 일들을 잊기에 충분했다. 희수는 그 전날 회식이니 뭐니 아무리 피곤 해도 철수를 위해 일찍 일어난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준비해 준다. 점심은 도시락 두개를 싸서 학교 교정 예쁜 벤치에 앉아 맛있게 먹는다. 저녁은 별 일이 없으면 항상 아침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재료들로 얼른 만들어 철수가 배고프지 않게 밥을 해 주었다. 철수도 너무너무 행복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언젠가 ’나 너무 행복해서 불안해.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자긴 이 보다 더 행복할 자격이 충분히 있어. 자긴 한번도 자포자기한 적이없잖아. 심지어 불행의 늪을 빠져 나올 의지조차 없을때 나를 잡아준 것고 자기였잖아. 지금보다 더 행복한 것이 뭔지 알려줘? 자기야, 자기 이제 아빠야.‘ 아! 철수는 행복의 극대값을 경험한 듯했다. 내가 아빠라니. 철수는 마치 자기가 이룰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낸 것 같은 행복감에 빠졌다. ’자기야, 이제 더 열심히 살게. 우리 부모잖아. 내가 더 열심히 살아서 자기 그리고 우리 애기 더 행복하게 해 줄거야!‘
둘은 그렇게 더 열심히 살았고 더 행복해 지도록 노력했다. 노력없이얻어지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들의 노력은 햇빛을 자신을 향하도록 끌어들였고 자신들을 비추게끔 만들었고, 마침내 그 빛을 주변까지 비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