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가운 태양 볕이 내리쬐는 한 여름 대낮이었다. 화장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얼굴이 어떻게 보일까 걱정이고, 땀에 절은 모시 바지에 하체가 다 드러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렇게 숨을 헉헉대며 나는 지하철 역에서 재수 학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재수생이었다. 오직 죽어라 공부만 해야하지만 또 가장 공부를 하지 않고 딴짓을 많이 하는, 어중간한 시절. 수업시간에 늦을 수 있는 아슬아슬한 시간이어서 종종걸음으로 학원을 향하고 있는데, 어느 남학생이 나를 불러 세웠다. 모르는 사람이다. 교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선행학습하는 고등학생이다. 나보다 어린 애구나, 라고 생각했다. 온 몸이 땀에 젖은 민망한 모습을 한 나를 불러 세운 그 남자애는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며 쵸컬릿을 나에게 건냈다. 같은 단과반 수업을 듣는데 나를 보았다는 것이다. 이런! 헌팅이구나. 아! 땀에 절어 민망해 죽겠는데 이 남자애는 눈치가 있는 건가, 없는 건가? 그래, 나를 봤는데 뭘 어쩌자는 건가? 그냥 무시하고 갈려는데, 그 남자애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나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이 아이, 전문 헌팅꾼은 아니구나. 정말 수줍어 하는구나. 차마 쵸컬릿을 받지 않는 만행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쵸컬릿만 받고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하고 나는 가던 길을 갔다. 그날, 그 시간 이후, 난 그 아이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아이는 내가 누나인 걸 아는 걸까? 내가 지지리도 공부 못해서 재수학원이나 다니게 된 날라리라는 걸 아는 걸까? 도대체 나의 뭘 보고 그런 짓을 했을까?
다음날, 학원 가는 길이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또 나타나서 쵸컬릿을 주거나 하지 않을까? 그냥 어제 하루 이벤트로 끝인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학원엘 갔지만 교실에 들어갈 때까지 그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 그러데 이 녀석 허를 찌른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는 곳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러지 말라고 하고 도망치듯 뛸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그 아이는 별 말이 없었다. 말주변이 없는 듯했다. 날라리인 내 촉각으로는 그 아이는 여자를 꼬셔본 경험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연애 경험도 없는 것 같았다. 내가 먼저 말을 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재수생이다. 나는 너보다 나이가 많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든 내년에는 대학을 가야 하기 때문에 너랑 사귀거나 그럴 수는 없다. 쵸컬릿은 고맙게 받았으니 이제 그만 나타나라. 등등의 얘기를 했다. 그 아이는 슬픈 표정으로 내 얘기를 듣더니 그냥 누나 동생으로라도 지내자고 그랬다. 좀 뻔한 스토리이긴 해도 나쁠 건 없다. 그래서 그러자고 했다. 은근 기분이 좋기도 했고.
몇일 뒤면 화이트 데이였다. 은근히,,, 뭔가를 기대했다. 마침 그때 사귀는 사람도 없었고, 쓸쓸한 화이트 데이를 보내기는 싫었다. 내 연애세포를 자극한 그 아이는 화이트 데이 때 나타날 것인가? 나타났을까? 나타났다. 너무너무 뻔하지만, 그래도 기분 좋게도 사탕을 예쁘게 포장해서 나에게 주었다. 아! 그럼 그렇지. 나 아직 안죽었다. 나는 그간의 그 아이의 정성에 대한 답례로 레코드 판을 선물했다. 그 당시 한참 유행하던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연주. 디셈버인가 뭔가 하던 레코드 판을 선물로 사 주었다. 그 아이는 무척 기뻐했다. 그렇게 그 아이는 일주일에 서너번 나에게 나타나 하교길을 배웅해 주기도 하고 쵸컬릿 같은 것을 주고 가기도 했다.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아이와 사귀어 주기에는 내 앞가림 하기에도 바빴고, 그때까지만 해도 젖비린내 나는 교복입은 고딩을 사귀기에는 내 가치가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는 내게 수줍은 얼굴로 손편지를 주고 갔다. 이런 저런 얘기들이 있는데, 어? 학교에서 반장이 됐다는 것이다. 이런! 모범생 이었구나. 역시나,,, 범생이의 냄새가 진동하던 그 아이는 역시나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나를 향한 마음이 얼마나 무겁고 진지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게 나를 매우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어설프게 사귀기라도 했다가 이 아이의 인생을 내가 망칠 수도 있다. 나같이 지지리도 공부도 못하는 날라리가 감당하기에는 그 아이는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이만 어중간하고 아슬아슬하던 관계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결심했다. 다음에 나타나면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얘기해 줘야지. 어?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기도 전에 그 아이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건 뭐지? 나는 그 아이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 걱정도 되었다. 그때 깨달았다. 난 그 아이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심지어 어느 고등학교 몇학년 인지도 묻지 않았다. 대체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고 해도 알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없었다. 그 아이는, 정말 바람처럼 나타나서 바람처럼 사라진 한 여름 밤의 꿈 같은 남자였다.
나는 이듬해에 겨우 전문대에 들어갔다. 그 아이의 존재에 대해서는 거의 잊고 있을 무렵, 나는 전문대에 들어와서 다시 만나게 된 고등학교 시절 남자친구와 다시 사귀기 시작했었다. 뭐, 그 녀석도 나와 비슷하게 공부 지지리도 못하는 날라리 였다. 고등학교때 내가 일방적으로 찼었는데, 우연히(?)도 같은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래서 다시 만났고, 다시 사귀기 시작했다. 그 녀석과 데이트를 하다가 예전에 다니던 학원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 녀석 말이, 너 대단하다며 어떻게 그런 어린 애를 재수생 주제에 꼬셨냐고 그러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순간 떠오르는 그 수줍던 아이! 내 남자친구는 말 실수 했다고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내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온갖 협박과 회유를 통해 알아낸 것은 매우 슬픈 진실이었다. 고등학교때 헤어졌던 남친은 나를 잊지 못해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고, 나에게 쵸컬릿을 주던 그 아이의 존재도 알게 되었고,,, 고딩때 일진이었던 남친은 그 아이를 가만 두지 않은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아이는 내 남친에게 폭행을 당했고 갖은 협박을 당한 것이다. 아! 그 순진하고 순수하고 수줍어하던 아이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남친에게 당장 꺼지라고 말하고 다시는 만나주니 않았다. 나는 눈물이 났다. 미안하다고 말할 방법 조차 알 수가 없었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그 아이의 푸른 시절을 멍들게 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공부도 하지 않고 날라리였던 것을 단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나는 날라리인 내가 좋았다. 그러나 딱 한번 후회하게 된 것이다. 나는 왜 날라리가 되어 날라리랑 사귀어서 순수한 한 소년의 가슴을 멍들게 했을까? 아! 나는 내가 싫어졌다. 날라리였던 것도 진심으로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미안했다. 이름 모를 소년이여! 나는 너의 진실된 마음을 받아 내기에는 너무나 천박한 그릇이었단다. 미안하다 소년이여! 그러나 그런 내게 너의 소중한 시절의 한 순간을 내게 준 것에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한다. 나의 슬프고 행복했던 한 순간의 일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