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만난 곳은 아일랜드의 어느 pub이었다. 극도로 불안한 눈빛을 하고 초췌한 얼굴을 한 깡마른 그녀는 결코 눈에 띄는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나의 눈에도 그녀가 띈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계속해서 같은 시간에 pub에 나타난 그녀는 무척 궁금했다. 그녀는 왜 아일랜드까지 왔을까? 여기서 뭘 하고 있을까? 저 불안한 눈빛의 이유는 무엇일까? 등등 점점 나의 마음은 그녀에 대한 궁금증으로 점점 차올랐다. 하루는 결심을 하고 그녀에게 말을 걸어 보기로 했다. 아일랜드에서 한국인이 한국인에게 말을 거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저 한국인이시죠?’그녀는 잠깐 나를 응시하더니 그냥 그 자리를 떠났다. 난 매우 무안했지만 그녀에 대한 궁금증은 거의 집착으로 변했다. 다음날, 그녀는 나타나 않았다. 그 다음날도, 다음날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매일 pub에 가서 open시간부터 close시간까지 그녀를 기다렸다. 그 날도 마찬가지로 그녀를 기다리다 나가는 순간 문 앞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는 무슨 아는 사람이라도 만난 듯 다가갔지만 그녀는 매우 당황한 표정이었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 ‘저기요, 잠시만요. 저 아시죠?’‘아니오’ 차갑게 대답하고 또 서둘러 떠나려는 그녀를 그는 불러 세웠다.‘잠깐만요. 얘기 좀 하시죠.’‘무슨 일이시죠?’‘,,,저 그냥,,,한국인 이니까...’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말해했다.‘맥주 한잔 하시죠.’ 그는 그냐를 뒤따라 들어가 맥주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그래, 무슨 얘기시죠?’‘,,,사실 특별한 용무는 없고, 그냥 그쪽이랑 얘기가 하고 싶었어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그녀는 담배를 깊게 한모금 빨며 생각에 잠기더니, ‘애리예요. 한애리. 여기 사람들도 Eri라고 불러요. 그 쪽은 이름이?’‘현기입니다. 조현기. 여기 사람들은 Cho라고 부르지요.’‘자 또 그럼 무슨 얘길 하죠? 직업은 뭔지, 어디 사는지,,, 그런 얘기들? 아님 좋아하는 색깔은 뭔지, 음식은 뭘 좋아하는지 그런 얘기들?ㅎㅎㅎ’매우 냉소적으로 들렸지만 처음으로 그녀가 웃는 것을 보았다. 매우 매력적이었다. ‘저는 화가예요 그림을 그리죠. 아일랜드에는 그리고 싶은 풍경이 있어서 왔어요.’‘그럼 이제 제 소개를 해야 하나요? 전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아요. 아일랜드에 온 것도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이고.’‘아,네,그렇군요.’ 그녀의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서로 소개를 주고 받은 것으로 만족했다.‘,,,저 괜찮으시면 내일도 여기서 만날 수 있을까요?’‘왜죠? 왜그러시죠? 혹시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네 그렇습니다. 관심 있습니다. 그 쪽이 궁금합니다. 안됩니까?’또 담배를 깊이 한모금 빤 그녀는 담배연기를 후 하고 내뱉으며 대답했다.‘네 그러시죠. 궁금해 하세요. 하지만 당신의 궁금증에 대한 책임은 당신이 지시는 거예요.’‘네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만났고, 이런 저런 얘기들을 했고, 꽤 친해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사라졌다. 매일 만났음에도 서로의 연락처도 교환하지 못했고 어디 사는지도 알지 못했다. 사라지면 그냥 그걸로 끝이었다. 내가 그녀에 대해 하는 것이라곤 이름이 애리라는 것, 외국 인들도 Eri라고 부른다는 것 뿐이었다. 그는 그 한가지 정보를 가지고 그녀를 찾아 해맸다. 필사적으로 찾았다. 아일랜드의 pub이란 pub은 다 뒤졌고 나중에는 전 영국을 해매고 다녔다. 그는 거의 폐인이 되었다 그림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오직 그녀를 찾아 해매는 것으로 인생을 탕진했다. 그러건 어느날, 그녀를 찾아 스코틀랜드 어딘가에 있을때 그녀가 그를 찾아왔다. ‘이럴 줄 알았어. 내가 뭐라고 날 이렇게 찾아 다니는 거야?’그녀는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 ‘사랑해’그는 단 한마디를 했다. 그녀는 결혼을 한 적이 있다. 사업가로 알고 결혼을 했다. 그러나, 사업가라는 것은 일종의 위장이었고 갱의 보스였다. 어느 날 우연히 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본 후 모든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이혼을 요구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갖은 협박과 폭력이었다. 그녀 주변의 모든 사람이 위험해 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도망간 곳이 아일랜드 였다. 그녀의 말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해 온 것이다. ‘나를 만나면 위험해져’ 그녀가 말했다. ‘세상의 모든 위험이 나를 향한다 해도 난 너를 찾을 거야.’‘바보’ 그때부터 두 사람은 도망의 여정을 같이 했다. 어디든 가고싶은 곳으로 갔고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이 머문 모텔의 밖이 한참 소란 스럽더니 총 소리가 났다. 비명 소리도 났다. 두 사람은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문이 열리고 총성 두 발이 울렸다. 그렇게 둘은 이 세상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경찰이 다음날 조사를 하면서 발견한 것이 있다. 똑같이 생긴 여자의 초상화 수백 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