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9월 추석이 다 되도 태풍이 북상한다. 이 때 비가 내리면 나는 꼭 그 때가 생각난다. 우산 없이 등교한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주느라 나는 쫄딱 젖었던 기억. 그렇게 바래다 줘도 ‘고마워’한마디 하고 쌀쌀맞게 집으로 들어가던 그녀. 그 때도 이맘 때였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인근 여고에서 제일 예쁜 아이였기 때문이다. 최소한 나 정도 되는 남자는 그 정도 여자는 사귀어 줘야 폼이 난다는 생각이었다.
그녀와 사귀기로 결심한 이후 나는 매일 그녀 주변을 맴돌았다. 비가오면 우산을 씌워주고, 등하교 길엔 당연히 같은 버스를타고, 그녀가 지각을 하면 자전거를 태워주고,,, 거의 모든 그녀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녀도 딱히 싫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나 또한 그 동네에서 인물이라면 빠지지 않는 미남이었으이까.
그녀는 첨엔 꽤 쌀쌀맞았지만 금새 친해지고 거의 항상 붙어다니는 사이가 되었다. 한참 친해질무렵, 너무너무 슬픈 일이 생겼다. 그녀의 집이 아버지 직장을 따라 서울로 이사를 간다는 것이다.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저 침통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연은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 않는 법, 내가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면서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다. 뭐 그녀도 남자친구가 있는데 나라고 여자친구 못사귈 소냐? 나도 부지런히 소개팅도 하고 미팅도 하고 다녔다.몇개월씩 사귀던 여자들도 있었고 일년 넘게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헤어지고 마는 것은 결국은 그녀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나는 그녀를 찾아갔다.‘야, 내가 그동안 소개팅도 많이 하고 미팅도 열심히 했거든. 근데, 결국 헤어지게 되는 건 결국 너 때문이야. 네가 나 책임져.’ 그녀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말했다.‘그게 왜 나 때문이니? 네가 덜 떨어진 탓이지.‘’아니, 야 사람이 말을 이렇게 하면,,,,‘;깔깔깔깔깔‘ 그녀는 결국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난 결국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졸 알고 있었지. 나도 남자친구들 사귀어봤지만 다 심각한 과거들은 아냐. 다들 덜 떨어졌더라구. 너처럼. 크하하하하하하하‘
이후 그들은 예전의 사이로 돌아갔다. 그녀가 어디 가서 뭘 하건 그는 그녀 주변을 맴돌며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주고, 비가 오면 우산을 씌워주고, 아침이면 오토바이로 등교를 시켜줬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말했다.’아빠가 너 만나지 말래. 내 혼처 이미 정해졌다고 결혼 날짜까지 잡아뒀데. 알잖아 우리 집에서 아빠가 어떤 존재인지.‘’뭐,뭐라구??? 왜 나한테는 기회도 안 주신는데? 내가 학벌이 딸려, 집안이 딸려?‘’응 너 많이 딸려, 그 사람은 하바드 출신에 대성그룹 차남이래.‘’아,,, 진짜 미치겠다.나 너네 아버님 한번 뵐 수 있을까?’‘얘기는 해볼게 근데 아마 안될거야. 아무나 안만나시거든.’
운 좋게 그녀의 아버지와의 만남은 성사 되었다. 한달을 그녀 아버지 직장에 매일 찾아가 만나 주십사 부탁한 결과였다.‘아버님 저는 왜 안되는 겁니까? 무엇보다 저희는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입니다.’‘사랑? 사랑이 밥먹여주나? 자네는 결혼을 사랑으로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하긴, 그럴 나이지.’‘아버님, 저 서울법대 다니구요, 졸업 후 검사가 될 생각입니다. 승승장구해서 아버님께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절대 그녀의 눈에 눈물 흘리거나 손에 물 묻히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아버님.’‘허허 젊은 친구 치고는 패기 넘치는 구만. 앞길도 창창하고. 한번 생각은 해봄세’‘감사합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아버님’
사실 서울법대 다닌다는 것은 거짓말 이었고 고시공부는 이제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다. 여튼 상견례를 잡아 보라고 연락이 왔고 아버지에겐 아들이 서울법대 다니는 고시생이라고 철저히 세뇌시켰다. 어른들 끼리의 대화는 잘 통했는지 일이 진행되기 시작했고 둘은 결혼에 골인했다. 문제는 고시였다. 무슨 수능시험처럼 공부 좀 해서 붙을 수 있는 시험도 아니고 이제 와서 사법시험 준비를 해서 어떻게 합격할 것인가?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나는 고시공부 3년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세상 일은 패기로 안되는 일도 많지만 한번씩은 만용을 부려볼 필요도 있다. 시골 출신 날라리 대학생이 검사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