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 현장에서
겨울의 한기를 듬뿍 머금은 2021년 1월 13일, 난 유아 식판에 고슬고슬한 밥을 정성스럽게 담고 따뜻한 미역국을 떠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공룡 모양 순살치킨과 애달픈 마음을 얹어 만든 소시지 반찬을 더해서 창가에 놔두었다. 그리고는 베란다 문을, 창문을 열어젖혔다. 아이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집안의 온기를 온몸에 감싸고 있는 말썽꾸러기 두 아들은 춥다고 난리였지만 난 꿋꿋이 10분 동안 창을 열어두고 오지 못할 아이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아이는 그 따뜻한 밥을 먹었을까. 한낮의 분노는 사라지고, 어느새 내 마음은 생면부지 딸아이 엄마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시위를 하고 온 후였다.
가마솥의 솥뚜껑이 달그락달그락하듯 곧 터질 것 같은 분노를 안고 서울남부지방법원으로 향했다. 시간은 오전 7시 30분, 법원 앞은 이미 시위대로 꽉 차 있었다. 각 방송사의 취재진과 시위대를 가로막는 경찰들이 분주히 움직였지만 나름대로 차분했다. 법원을 둘러싸고 있던 울타리엔 약 100미터 횡렬로 근조가 세워져 있었고 근조 사이에 익숙한 얼굴의 사진이 검은 띠를 위로 두른 채 국화와 함께 진열되었다. 사진 속 아이는 참 맑고 환했다. 아이 사진을 보니 또 터져 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함께 피켓을 들고 있던 시위대 중 한 명이 함께 울며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녀의 작은 손길은 엄동설한에도 따뜻하게 다가와 나를 위로했다.
-16개월 입양아, 정인이 양모 1차 공판-
현장으로 갔던 이유는 하나다. 난 대한민국의 수많은 ‘정인이 엄마’ 중 하나였다. 비슷한 개월 수의 둘째를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와 힘들었다. 그곳엔 나와 같은 마음의 ‘정인이 엄마’들이 많았다. 그리고 정인이 양모도 있었다. 다만 그녀는 학대 가해자로 호송차에, 우리는 시위대 속에 있었다. 공판이 끝나고 2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그녀가 탑승한 호송차가 나왔다. 그 순간 시위대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호송차를 막았다.
“봐! 보라고! 네가 죽인 정인이를 보라고!”
분위기는 급변했다. 취재진은 시위대를 따라다니며 카메라를 들이댔고, 경찰들은 흥분한 시위대를 제지하기에 바빴다. 순식간에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와중에 시위대 한 명이 제지하던 경찰의 발에 걸려 넘어지면서 폭력시위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의 절규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떨리고 있었고,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당신들만 정인이 엄마가 아니야. 우리도 정인이 아빠라고.”
경찰 근무복을 입은 남자였다. 그는 분명 시위대를 제지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제지하면서도 흐느껴 울었다. 내 시선은 꽤 오랫동안 그에게 멈췄다. 어느새 취재진도 다가가 그를 카메라 렌즈에 담고 있었다. 호송차가 가까스로 빠져나가고 상황이 조금 진정되기 시작할 무렵, 난 눈 녹은 땅을 저벅저벅 걸어 그에게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정인이 아빠여서.”
그가 고개를 들고 비로소 흐느낌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추위에 얼어붙은 빨간 볼에, 뜨겁게 흐르던 그의 눈물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날 서울남부지방법원에는 경찰, 시위대, 방송 취재진, 법원 관계자들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 같은 정인이 엄마였고, 아빠였다. 카메라를 힘겹게 내려놓고 흐느끼는 취재진도 있었고,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 할 일에 자괴감이라도 느끼는 듯 맥없이 서 있는 경찰과 법원 관계자들도 있었다. 각자의 위치는 달랐지만, 표정은 같았다. 우린 아팠고, 괴로웠고, 슬펐다.
집에 돌아와 그 경찰이 생각나 한참 동안 인터넷 기사를 뒤졌다. 그 경찰을 찍고 있었던 취재진이 생각나서였다. 혹시나 그의 모습이 실린 기사가 있지는 않을까, 어디 영상은 없을까. 며칠 동안 찾아봤지만, 수없이 쏟아지는 관련 기사들 사이에서 그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찾지 못했다. 찾는 걸 포기하는 순간 생각했다. ‘내가 왜 그 사람을 찾고 있지?’ 그건 아마도 그가 흘린 눈물을 함께 위로하고, 위로받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이제 항소심까지 끝나고 정인이 양모는 살인죄를 적용받고 복역 중이다. 그리고 그 경찰은 지금도 여전히 다른 현장에서 시위대를 진압하며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시위의 현장에서는 옳음을 외치는 사람들에 맞서 안전사고에 대비해 항상 경찰이 배치된다. 그때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이 생기고 서로 대립하기도 한다. 하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시위가 끝나면 우린 인간으로서 서로를 존중한다. 그날 그 경찰관의 눈물은 아직도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있다. 다시 만날 날은 없어야겠지만, 혹시 만난다면 그날을 위로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