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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찾는 마음 Oct 12. 2022

잊혀진 자들의 전쟁 - 19. 드레이크 백작


신주쿠의 밤은 갖가지 색깔의 네온사인 불빛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선사했다. 취객들은 하룻밤의 값싼 향락을 찾아 비틀거리고 있었다. 긴 검은 코트를 입고 장발의 머리를 한 건장한 체격의 남자는 이미 충분한 재미를 봤는지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얼굴에서는 강인함과 함께 귀족적인 품위도 흐르고 있었다.     



신주쿠의 휘황찬란한 불빛들 위로 솟아있는 건물들 옥상을 검은 그림자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남자는 미소를 띠며 약간 어둑한 골목길을 향하였다. 그가 골목길로 들어서자 건물 위의 어둠 속에서 수리검 하나가 남자의 정수리를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남자는 피하지 않고 날아온 수리검을 집게손가락으로 잡아채고 중얼거렸다.      



“쥐새끼들이..”     



남자가 수리검을 날아온 곳으로 다시 던지자 수리검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 던진 자의 이마에 박혔다. 괴한이 건물 옥상에서 추락하자 건물 위에 있던 다른 괴한들이 일제히 움직이며 수리검을 날리기 시작했다. 마치 비가 오듯이 수십 개의 수리검이 남자를 향하여 쇄도했지만 남자는 이를 피해 어느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남자의 눈은 붉은빛을 형형하게 발하며 건물 옥상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들 중 하나에 손을 뻗었다. 마치 자석에 끌리듯 그림자 중 하나는 순식간에 남자의 손으로 끌려가 그의 오른손에 목이 붙잡혔다. 남자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그림자는 숨을 쉴 수 없어 버둥거렸다. 그림자는 온몸에 칠흑 같은 천을 두르고 두 눈만 노출한 자객이었다.     



“시노비인가?”     



남자는 질문을 했지만 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그의 오른 손아귀에서 자객의 목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다른 자객들이 일제히 끝에 추가 달린 쇠사슬을 남자에게 날렸다. 남자의 팔다리가 날아온 사슬들에 감겼다. 자객들은 남자의 팔다리를 휘감은 사슬을 사방에서 당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객 중 하나가 칼을 뽑아 곧장 남자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오랜만에 즐겁게 해 주는군.”     



자객들이 잡아당기고 있는 양팔에 감긴 사슬을 남자는 힘을 주어 당겼다. 사슬을 붙잡고 있던 자객들은 남자의 완력을 이기지 못하고 남자에게로 끌려 날아갔다. 남자의 심장을 향하던 칼날은 허망하게도 같은 편 자객들의 몸통을 꿰뚫었다. 남자는 팔을 앞으로 빠르게 찔러 손톱으로 자객들의 몸통을 꿰뚫었다.      



그리고 다리에 감긴 사슬을 잡아당기니 사슬을 잡고 있던 자객들은 마치 불빛을 향해 돌진하는 나방처럼 남자에게로 날아갔다. 남자는 긴 송곳니를 드러내어 날아온 자객들의 목덜미를 잡고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순식간에 자객들은 말라비틀어진 나무뿌리처럼 쪼그라들어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10여 명의 자객들은 그런 식으로 남자와 대결다운 대결도 해보지 못하고 피와 양기를 빨린 채 아래로 추락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자객 두 명이 있는 힘을 다해 도망가고 있었다. 그들은 남자로부터 이미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 안심하는 듯했다. 그러나 남자는 밤하늘을 가르며 순식간에 그들을 따라잡았다. 그들의 목덜미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수십 명의 자객들이 사방에서 칼끝을 남자에게 향하여 날아들고 있었다. 함정이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틈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포위망이 사방에서 좁혀오고 있었으나 남자는 차갑게 웃고 있었다. 순간 남자의 몸으로부터 핏빛 가시가 끝에 달린 촉수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왔다. 촉수들은 마치 쇠기둥 같은 위력으로 자객들의 몸을 꿰뚫고 성게의 가시처럼 사방으로 펼쳐졌다. 자객들은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처럼 촉수에 꿰어 움직이지 못했다.     



호기롭게 달려들던 수십 명 자객들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가 버린 남자는 차가운 웃음을 잃지 않으며 외쳤다.     



“한조, 내가 시키는 대로 한국의 피라미들을 처리해야지. 오히려 나를 공격하다니 어찌 이리 어리석나? 일족이 멸망해야 정신을 차리려는가? 이번 애교는 너그러이 봐주겠지만 한 번 더 이런 시도를 한다면 너의 일족을 씨도 남겨 놓지 않겠어.”     



높은 건물 옥상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던 한조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흡혈귀를 사냥하며 다니던 자신의 일족이 이처럼 허무하게 학살당하는 현장을 보며 굴욕감과 함께 깊은 비애를 느꼈다. 하나뿐인 딸 아키코가 저 흡혈귀에게 인질이 되어 어쩔 수 없이 그의 명령에 따라 아끼던 두 제자를 한국에 보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두 제자가 나균이 토해낸 늑대에게 갈가리 찢겼다는 가슴 아픈 소식이었다. 한조는 두 제자의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딸아이 하나를 구하기 위해 흡혈귀의 수하가 되어 움직이고 제자들까지 잃었다는 사실이 더 뼈아프게 다가왔다. 그래서 결단을 내리고 저 남자를 공격하여 딸아이의 행방을 알아내려 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다. 이 정도로 힘의 차이가 있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이제 일족의 운명이 저 미치광이 흡혈귀의 손에 달려있음을 절감했다.      




일명 닌자나 시노비라고도 불리는 한조의 일족은 전국 시대부터 각종 첩보나 암살, 파괴 등의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들은 흡혈귀 같은 크리처를 사냥하는 헌터 역할도 병행하고 있었다. 크리처가 주민들을 살해하여 주민들 사이에 공포가 확산되고 공물을 바칠 주민이 줄어드는 것을 영주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노비들에게 크리처 사냥을 맡겼다. 그러나 크리처의 존재 자체가 주민들 사이에 알려지면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에 시노비들의 이 임무는 비밀에 부쳐졌다.      



과거에는 다이묘(영주)의 지시에 따라 크리처를 처단하며 살아왔지만 다이묘가 지배하던 전국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시노비들은 민간인들의 안전을 위해 크리처 처단의 임무를 자발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더 이상 그들을 지배하는 다이묘는 없지만 일족과 민간인의 안전을 위해 시노비들은 아직도 목숨을 걸고 크리처 사냥을 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음지에서 헌신하던 시노비의 자부심도 끝이 나고 있었다. 저 미치광이 흡혈귀의 가공한 힘을 확인한 이상 저자에게 또다시 도전한다면 실제로 일족 멸망의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었다. 한조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한조는 옆에 살아남은 시노비들에게 외쳤다.      



“돌아간다. 한국에서 죽은 켄지와 노무라의 복수를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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