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은 홀로 청사 밖에 서 있었다. 금발을 날리며 그는 긴 칼로 빈스를 가리켰다.
“아까 내지 못한 승부를 내자. 너와 나 단둘이서.”
“왜 우리 둘이 승부를 내야 하지?”
“나는 알고 있다. 내 영겁의 무의미한 세월 동안 단 하나의 빛이었던 사라를 너도 사랑했던 것을. 사라가 보잘것없는 비열한 인간에 의해 그토록 참혹하게 살해당했는데 그래도 인간 편을 드는 너를 나는 용서할 수 없다.”
“내가 사라를 사랑했던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사라가 너와 연인이 되고 나서 나는 깨끗이 포기했어. 사라를 죽인 인간이 있다고 해서 모든 인간을 죽이겠다는 발상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사라도 결국 인간이었어. 그걸 잊지 말라고.”
“사라를 죽인 벌레 같은 인간을 내가 도륙했다고 해서 내가 악인인가? 말이 없는 하늘을 대신해서 정의를 실현시킨 나를 살인귀로 몰아간 너희들은 과연 정의롭다 할 수 있느냐 말이다.”
“사라가 사랑한 것은 친절한 너의 모습이었다. 지금처럼 인류를 모두 도륙하겠다는 살인귀가 과연 사라가 사랑했던 남자일까?”
순간 제이슨은 가공할 속도로 빈스를 향해 검을 찔러왔다. 둘은 인간의 눈이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검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빈스가 제이슨의 가슴을 향해 검을 내지르는 순간 제이슨은 빈스의 검을 막으려던 칼을 살짝 아래로 떨구었다. 빈스의 검이 제이슨의 심장을 꿰뚫었다.
빈스가 놀라서 제이슨의 가슴에서 칼을 뽑아냈다. 그러자 제이슨은 빈스의 품으로 쓰러지며 피를 쏟아냈다. 제이슨은 빈스에게 속삭였다.
“빈스. 이제 난 너무 지쳤어. 사라가 없는 세상은 살아내기에는 너무 무의미해. 영겁의 고통을 받느니 차라리 이제 끝내고 싶어. 이왕이면 내 친구의 손에서 이 삶을 끝내고 싶었어.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빈스..”
제이슨은 빈스의 친구였다. 둘은 수백 년간 웃고 울며 많은 추억을 공유한 형제 같은 사이였다. 제이슨이 사라와 연인이 되고 이를 견디기 어려웠던 빈스는 먼 여행을 떠나며 둘은 사이가 소원해졌다. 사라의 비극을 머나먼 이국 땅에서 들은 빈스가 제이슨을 찾았을 때는 제이슨은 이미 사라를 죽인 범인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잠적한 후였다.
그 이후로 제이슨은 본능에 충실히 인간을 사냥하고 다녔다. 인간의 편에 서 있었던 빈스는 제이슨과는 적이 되었다. 제이슨이 계속 인간을 살해하거나 흡혈귀로 만들고 다니는 것을 방조한다면 인간 사회에서 흡혈귀들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애써 이룬 헌터들과의 평화도 송두리째 파괴될 위험이 있었다. 제이슨이 혜수의 집을 습격하기 전에도 둘은 몇 번 마주쳤고 마주칠 때마다 빈스는 제이슨에게 살인을 멈추라고 설득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빈스는 제이슨을 멈추기 위해 검을 빼어들 수밖에 없었다.
빈스는 자신의 품에 있는 적이 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제 편히 쉬게, 친구.’
제이슨은 실로 오랜만에 휴식을 취했다. 더 이상의 저항 없이 친구의 품에서 자신을 찾아올 영원한 안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는 눈을 감은 채 평온한 얼굴로 죽음을 맞이했다. 곧 사라를 만나게 된다는 기대에 찬 표정이 떠오르는 듯도 했으나 이내 재가 되어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렙타일의 대사제 셔먼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더 이상 어머니 가이아의 지시는 예전처럼 평화로운 음성을 띄지 않는다. 매번 조용하지만 위압적인 분노와 함께 내려지는 가이아의 신탁은 셔먼티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전쟁 전에는 신탁을 받고 나면 마음의 평온함과 자유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기쁨은 사라지고 두려움만이 남았다. 신탁의 방에서 나온 셔먼티를 대마법사 멀린은 반갑게 맞이한다. 자신의 종족을 피바람이 부는 죽음의 골짜기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으로 흔들릴 때마다 멀린은 셔먼티를 바라보며 가이아 님의 지시는 절대적이며 렙타일 종족은 가이아 님이 보호해 주실 거라고 안심시킨다.
하지만 멀린의 말 때문에 안심이 된다기보다 멀린의 눈에서 쏟아지는 안광과 멀린의 음성에서 전해지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셔먼티는 설득되는 듯했다. 멀린과의 대화가 끝나면 셔먼티의 눈은 붉게 빛나고 그는 알 수 없는 힘이 온몸을 뒤덮는 것을 느꼈다.
신탁이 끝나고 셔먼티는 케세론 왕을 멀린과 함께 알현하며 신탁의 내용을 전했다. 멀린은 왕과 대사제를 보며 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케세론 왕의 눈도 붉게 빛나고 있었다. 왕과 대사제를 바라보고 있는 눈은 멀린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눈들이 멀린의 눈을 통해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