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멈춘 듯했던 시간을 지나, 다시 호주의 일상으로

by 꿈꾸는자

한국이 막 더워지기 시작하던 6월의 마지막 주, 우리는 다시 추워진 퍼스로 돌아왔다. 코끝이 시린 호주의 새벽 공기는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고, 오랜만에 들어선 집은 아무리 히터를 틀어도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익숙한 공간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리웠던 아이들의 방, 각자의 침대와 장난감, 마당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바라보며 ‘정말 돌아왔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고작 두 달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이민 후 가장 길게 집을 비운 터라 더 낯설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돌아오자마자 열심히 짐을 풀고, 냉장고를 채우고, 빨래를 돌리며 우리 가족의 온기로 이 집을 다시 데워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오랜만에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났고, 익숙한 환경 속에서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짧은 등교 기간 후 바로 이어진 2주간의 방학 동안엔 마음껏 놀고 쉬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고, 이제는 다시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지난 3개월은 온전히 가족과 붙어 지내며 가족을 위해 집중했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들이 분명 소중하고 의미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나만의 시간이 그리운 순간들도 있었다. 이제 남편과 아이들의 일상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나에게도 오랜만에 고요한 시간이 찾아왔다. 비로소 나도, 멈춰 있었던 나의 일상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난 학기에 절반 이상 마쳤지만 마무리하지 못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나의 공부도 다음 주부터 다시 이어간다. 원하는 모든 과목이 이번 학기에 개설되지 않아 1년에 걸쳐야 겨우 수강할 수 있다는 사실이 속상하고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천천히 다시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가정을 돌보는 일과 공부, 나만의 시간을 균형 있게 이어가려 한다.


이번 일은 남편과 나, 그리고 우리 가족과 주변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위암 진단 직후 느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들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지금껏 붙들고 있던 것들 중 놓아야 할 것은 무엇이고 더 강하게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조금씩 더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줄이고, 마음속 이야기를 더 자주 나누게 되었고, 서로를 더 아끼고 주변을 더 살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게 되었다. 원래도 나름 건강하게 먹는 편이라고 자신했지만, 그 이후로는 더욱 의식적으로 건강한 식습관을 유지하며 우리 가족을 돌보려 애쓰고 있다. 물론 그 균형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만 말이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분야 안에서도 어떤 부분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은지, 공부를 마친 후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 조금씩 더 구체적으로 그려보게 되었고, 삶을 대하는 태도 또한 한층 진지해진 것 같다. 예측하지 못한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예측하지 못한 배움과 성장이 있었던 것이, 지금 돌아보면 우리의 또 하나의 감사의 제목이 되었다.


이제는 남편의 식단을 챙기고 가정을 돌보는 일도 점점 익숙해지고, 나름의 노하우도 생겨 이전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암이라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우리 가족을 잠시 멈춰 세웠지만, 그 변화 덕분에 우리는 삶을 되돌아보며 마음을 고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재발에 대한 두려움이 문득문득 마음을 스치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을 감사히 여기고, 함께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더욱 소중히 바라보려 한다. 조심스럽지만 단단하게, 우리는 다시 우리의 일상으로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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