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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릉밈씨 Mar 27. 2024

기대하는 게 없으니 바라지도 마십시오

 접점도 없는데 계속해서 시간을 내달라던 사람에게 그냥 처음부터 질러버렸다.

 "저 이혼녀예요."

 - "앗? 말해줘서 고마워요."

 민감한 개인적인 일일 수도 있는데 자신에게 털어놔 줘서 고맙다는 부연 설명을 붙였지만 그는 더 이상 시간을 내달라고 하지 않는다. 휴, 그래도 이번엔 이렇게 신속하게.


 멋대로 다가왔다가 멋대로 사라지고, 기분 상하는 건 나의 몫.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게 되었으나 여전히 사람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할 수 있다면 아무 피해 주지 않고 조용히 살 테니 그저 저 좀 내버려 둬 주세요. 아주 맘대로들 자기들만의 이상향을 투영하고 그 모습에 내가 부합하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말로, 잘못되었다는 말로,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로 내 탓을 해대는데.....



내가 사랑했던 남자들아, 
내가 언제 너희들을 나만의 이상향에 맞춰 바꾸려고 한 적 있었니?



 당연히 불만들을 털어놓은 적은 많지만 근본 자체를 뜯어고치려고 한 적은 없다. 되려 그들의 말에 정말 내가 이상한가, 그렇게 부족한 사람인가 의기소침한 적은 있다. 그런데 내 동생이나 친구들이 연애하고 결혼하는 모습 보니까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한 내 모습.. 다른 사람들도 그럴 때 많았고, 오히려 더 심한 경우도 봤었고, 그런데도 그 상대방이나 배우자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주고 잘만 지내더라?


 물론 앞선 글들에서처럼 나 스스로 많이 딱딱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잘 인지하고 있다. 이왕 딱딱하게 태어난 김에 차마 연애 당시에는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삼켜왔던 말들을 이혼녀가 된 지금에서야 솔직하게 고백한다.


(순도 100% 내 연애 경험 기준)

 나는 내 남자친구들의 허세가 우습기 짝이 없었다. 자기 스스로 능력 있는 것처럼 구는데 막상 벌린 일들을 보면 디테일을 챙기는 것이 부족했다. 팔로우업은 누가 했다고 생각하는지? 손이 너무 많이 가서 어엿한 성인 남성인지 어린아이인지 분간이 어려울 때가 있었다.

공사 망라하고 대소사에 대한 처리를 '일 처리'라고 통칭하며 일 처리에 대한 것을 더 이야기해 보자면, 지름길을 놔두고 돌아가는 길을 택하는 경우가 많이 보였다. 다른 방법을 제시하면 이해조차 하려 하지 않고 고집을 부렸으며 나는 다시금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 어엿한 성인 남성인지 어린아이인지 헷갈려졌다.

그래놓곤 자기 고집대로 일이 잘 진행되지 않는다며 엄청 억울해한다. 나를 붙들고 하소연을 하며 심할 때는 운다. 전혀 공감하거나 달래주지 않는 나를 보며 갑자기 모든 일의 화살을 내게 돌린다. 그야, 나는 일이 잘 안 풀릴게 뻔히 보였는걸, 무슨 공감을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이쯤 되면 내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 사람인지 바보인지가 헷갈리게 된다.


 지나간 일을 회고해 보았을 뿐인데 현재진행형인 것처럼 속이 답답하고 급 피곤해진다. 누구를 사귀는 것보다 혼자가 훨씬 마음 편하고 효율적인데 굳이 왜 다시 연애 관계라는 족쇄를 차야 할까? 외롭지 않냐고? 외로울 때도 있다. 그런데 외로움이 주는 감정을 오롯이 끌어안은 채로 공부를 하거나 책, 영화와 같은 콘텐츠 탐닉, 여행 등을 하다 보면 광활하고 깊은 바닷속에서 조용히 안정을 취하고 있는 듯한 굉장한 사색의 경지와 지적 충만감을 느끼게 된다. 이게 내게 꽤나 행복감을 준다.


 어차피 나와 관심사나 관심사에 대한 지식이 맞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완전함을 느낀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기대하는 것이 없다. 그러니 당신, 내게 함부로 다가와 바라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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